[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사실 불상에 불공하는 것과 〈정전〉에서 설하는 불공하는 법의 근본 의미는 같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불상의 재료인 나무·동·철·진흙 등에 경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만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행위가 된다. 여기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잘 받들어 행하겠다는 다짐을 한다면 그것은 최상의 불공이 된다. 불공이 불법의 핵심 가르침임은 그 역사가 증명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당연히 부처는 오직 한 분뿐이다. 불교는 역사상의 부처님의 출현에 의해 발생한 종교인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400년 동안 부파불교의 시대를 거쳐 기원후 1세기가 되면 보살이 등장한다. 이들은 부파불교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재가신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소승이라고 폄훼하고, 스스로 부처가 되어 모든 중생들을 깨닫게 하며 자비심으로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대승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소승이라는 말은 차별적인 언어이므로 쓰지 않고, 남방불교 또는 테라바다불교라고 한다.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확산된 남방불교권에서는 석가모니불 이후 아득한 미래에 미륵불 세상이 오기까지는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시방세계, 즉 이 세계 곳곳에는 현재도 무수한 부처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는 부처를 부처이게끔 만든 법의 근원인 법신불사상의 발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제불에 대해 기쁘게 찬탄하며, 스스로 참회하고, 사바세계의 중생을 구원해 주시기를 빌며, 선행의 공덕을 회향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또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사상이 발전한다. 특히 여래장사상은 여래의 태아와 같은 의미로 우리 안에 여래와 같은 본성(=진여)이 있으며, 법신과 다름이 없고, 우리 자성은 청정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래장은 번뇌에 둘러싸여 있어 수행을 통해 드러낼 수밖에 없다. 대승불교에서 수많은 종파가 발생하게 된 배경 중 하나는 부처가 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의 발전에 있다. 이로써 우리는 보리심(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의 각오)을 세워 노력만하면 언제든 부처가 될 수 있다. 단지 개인차가 있어 부처가 되는 시일이 다를 뿐이다. 

불공하는 법에서 과거 불공하는 전통을 인정하면서도 우주만유는 법신불의 응화신이므로 곳곳이 부처이며, 일마다 불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한다. 불법의 최종적인 가르침은 이것으로 수렴할 수 있다. 죄복의 권능이 사은 당처에 있다는 것은 사은의 근원이 법신불이기 때문이다. 자타의 마음에는 우주만유의 근원인 법신불이 있으므로 부처와 부처가 서로 조응(照應)하는 것이다. 외형으로 드러난 형체가 아니고, 불성과 불성이 만난다면 불국토가 따로 없다. 악으로 절망하는 중에도 선하고 자비로운 평화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무명에 의한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면 자타 모두 부처가 되어 그 심법을 실천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사은의 일부인 산하대지도 마찬가지이다. 산하대지 또한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먹여 살리며 보호하는 부처의 권능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 이 권능을 우리가 잘 받든다면 의식주 모두가 저절로 해결된다. 불공법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처럼 불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한 불교의 장구한 역사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3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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