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쿵' 정신이 번쩍 든다. 벌떡 일어나보니, 좌선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등 뒤에 식은땀이 실제로, 흘렀다. 때는 2000년, 스스로 이렇게 소개하곤 했다. "반갑습니다. 새천년 밀레니엄 간사 이혜성입니다!" 밀레니엄 간사에게도 새벽 좌선은 힘들었다.

종종걸음으로 익숙지 않은 온갖 업무를 하다 만근은 됨직한 몸을 이끌고 좌선시간에 앉아있자니, 졸지 않을 겨를이 있겠는가. 총부에서 오신 원로법사님과 함께 좌선을 했던 문제의 그 날, 혼수상태로 졸던 내가 '반좌로 앉은 채'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렇다. '쿵'은 내 머리가 바닥에 광속으로 떨어진 소리다. 적막한 좌선 시간에 대포처럼 울려 퍼진 소리에 다들 얼마나 놀랐을까. 식은땀의 존재를 그때 알았다. 어찌 당황했던지 통증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날 내가 얼마나 혼났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돌아보면 간사 시절엔 늘 혼났고, 늘 조심하며 살았다. 물론 조심한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혼나는 번수가 밥 먹은 번수보다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심보다 분발심이 더 많던 기간이다. 다만 "혼내는 일에 공력을 얼마나 들여야 하는지 아느냐, 잘못을 계속해서 알려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애정인지 아느냐" 그 시절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근래 '한 장면'을 바라보다 번뜩 그 말이 떠올랐다. 스승의 은혜를 새삼 느꼈다. 다시 2019년의 좌선시간, 한 예비교무가 벌떡 일어나 깜짝 놀랐다. 그 교우는 졸고 있는 교우의 뒤에 가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저렇게 하면 졸던 교우 마음이 엄청 요란하겠는데?' 기분 나빠할 모습이 눈에 선해, 걱정되기 시작했다. 둘의 사이가 틀어질 것 같다.

한데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졸던 교우가 고맙다는 듯 목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장면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내가 있다. '나는 왜 기분 나빠할 거라고만 생각했지?' 아! 내가, 그런 상황엔 기분 나빠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의 마음 방향대로 세상을, 장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는 타인이 날 깨우치려 할 때 이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되었단 뜻이다. 더군다나 나였다면 옆에 도반이 아무리 졸아도 깨우지 않았을 거다. 상대와 내가 감정적으로 대질릴까 봐, 손해 보기 싫은 마음도 있다. 괜히 깨웠다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제야 충고가 얼마나 큰 애정인지, 계속 알려주는 것이 어떠한 공력인지 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게 충고 해주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나도 누구에게 충고하려 하지 않는다. 

정산종사는 "충고를 감수할 경지만 되면 그 공부는 일취월장 하나니라"고 법문했다.(〈정산종사법어〉 법훈편 18장) 내게 충고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일취월장 할 기회가 없다는 말이 된다.

동시에 다른 이에게 충고하기를 주저하는 마음은 상대가 일취월장할 기회도 주지 않는 일이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점점 '상대가 충고 해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에 '손해가 두려워 충고를 못 하는 비겁함'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섭게 여겨야겠다고 좌선 시간에 동지의 잠을 깨워준 도반이 일깨워준다.

/교학대 서원관

[2019년 3월1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