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성과 주착심을 놓으면 자신의 어떤 모습에도 편안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구전심수(口傳心授)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도록 가르침을 이르는 말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구전심수의 정법 아래 사람사람이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하기 위해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을 내놓으셨고 이를 훈련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인 〈정전〉을 생활 속에서 응용한 후 지도인에게 일일이 문답할 때 법맥(法脈) 신맥(信脈) 법선(法線)을 올바로 연할 수 있습니다.  

▷공부인: 제 얼굴엔 꽤 오래전부터 기미가 끼어 있습니다. 맑고 밝고 깨끗해야 할 수도인의 얼굴에 기미가 끼어 좀 창피하기도 하고 때론 고민도 됩니다. 그런데 며칠 전 3년 만에 만난 청년 교도와 점심을 먹게 됐습니다. 그 청년은 제 얼굴을 쳐다보더니 "교무님 많이 아프셨어요? 얼굴도 안 좋고 기미가 많이 생겼네요" 하더군요. 저는 흔연스럽게 웃으며 그러냐고 대답했지만, 그 뒤로도 계속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그 청년이 밉고 밥맛까지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는 교무님이 끼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기미가 많이 없어졌네' 라고 말했습니다.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 교무님이 간 뒤에 얼른 거울을 보니 정말 얼굴이 좀 깨끗해진 것 같았습니다. 

▶지도인: 이미 ○○공부인은 자신의 마음 작용을 잘 바라보고 계시네요. 두 사람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내게 수도인의 얼굴은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분별성과 주착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인: 제가 두 사람의 말에 속은 것이 아니라 제 마음에 속았군요. 제 얼굴은 그대로니까 기미가 없다고 해서 있던 것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서 없던 것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보는 사람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보일 수 있는데, 제게 수도인의 얼굴은 깨끗해야 한다는 분별성과 주착심이 있으니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기분이 나빴다, 좋았다 한 거네요. 

▶지도인: 그렇죠. "정신 차려!"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잘 쓰는 말이기도 하고, 소태산 대종사께서 직접 쓰신 〈천도법문〉에도 "정신을 차려 잘 들으라"고 여러 번 나옵니다. 정신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입니다.(〈정전〉 정신수양의 요지) 
분별성은 좋다, 싫다, 밉다, 곱다 등으로 판단을 구별 짓고 분별하는 마음의 성질입니다. 주착심은 그 구별 지은 마음에 집착해 고정 짓는 마음입니다. 고정관념이 바로 분별성과 주착심입니다. 고정관념, 선입견을 놓는 것이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수도인의 얼굴은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이고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을 놓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어떤 모습에도 편안해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 사람의 겉모습으로 고정 짓지 않게 되고 사실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悟得)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입니다. 

▷공부인: 수도인의 얼굴이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분별성과 주착심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지네요. 

▶지도인: 분별성과 주착심은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마음의 습관일 따름입니다. 그저 알아차리기만 하시면 됩니다. 

▷공부인: 죄책감도 제 마음의 습관인가 봐요. 분별성과 주착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수도인이 되어서 분별성과 주착심에 속고 살았다는 자책이 먼저 드니 말입니다. 수도인은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걸려 있다고요.

▶지도인: 수도인이라는 단어도 좋지만 저는 공부인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마음에 무언가 걸려있을 때 '내가 원래 마음에 뭔가 걸려 있는 사람이 아니건만 경계를 따라 걸려있었구나.' 그 마음으로 공부하는 기쁨과 재미가 큽니다.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단지 '죄책감이 드는구나.' 알아차리고 그 마음으로 공부만 하면 됩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을 알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 하는 것이 수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스스로 없어지기 때문에 애써서 '없애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화훈련부

[2019년 3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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