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일요예회다. 자리에 앉자마자 귓가에 '삐' 소리가 들린다. 먼저 나를 의심한다. "이명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현악 조율하는 소리인가" 그것도 아니다. 계속 듣다보니 방송설비 관련한 소음이다.

곧 예회가 시작인데 큰 일이 발생했다. 진행측이 무언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인가보다. 처음엔 이명처럼 작게 들렸던 소리가 의식한 순간부터 점점 더 크게 들린다. '삐'소리는 내게 들리는 모든 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앞 도반의 말소리보다 현실적으로 분명히 더 작은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신비를 경험한다.

지속적인 '삐'소리에 정신이 약간 몽롱해지기도 한다. "성가라도 한 곡 연주해주지. 법회 전에 이게 뭐람. 악기소리에 삐 소리가 묻히면 좋겠는데" 고요한 법당에 사정없이 울려 퍼지는 '삐'소리와 아무런 대책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이 소리를 없애야 하는 소리라고 생각할까? 이 소리는 예회에 들려주는 법신불사은님의 설법이다. 모든 소리가 법신불 사은의 소리인데, 이 소리라고 예외이겠는가. 소리에 번뇌를 일으키는 나에게 해주는 설법인거다."

마음을 멈추고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자니, 소리엔 허물없음을 발견한다. 이것이 싫다 좋다 규정하는 나에게 허물이 있을 뿐이다.

이 소리가 '나면 안 되는 소리' 혹은 '듣기 싫은 소리'라고 규정하기에 마음 불편한 거다. 나면 안 되는 소리란 없다. 소리는 다만 소리이기 때문이다. 법회가 시작되었다. 소리는 여전하다.
하지만 사회자의 말소리와 관현악단의 악기소리와 '삐'소리가 평등해졌다. 난 이제 괜찮다. 이 이야기가 여기서 마치면 참 좋으련만, 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개는 떠다니는 인간이 아니던가.
평온했던 마음은, 독경이 끝나고 독경소리에 가렸다 또 다시 들리는 '삐'소리에 산산이 깨졌다. 안 들리다가 다시 들리니, 또 그 마음이 난다. 독경소리와 '삐'소리가 또 불평등해졌다.

다시 회광반조하자. 마음을 챙겨, 그 어떤 소리에도 물들지 않는 자성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번뇌 즉 보리가 아닐까?' 하는 자각이 온다. 평등한 자리에서는 이미 하나라 보리라고, 깨달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 불평등해져야 비로소 불평등함에 의지하여, 불평등에 물들지 않는 자성을 발견할 수 있기에 '번뇌가 곧 깨달음'인 것은 아닐까.

물고기가 물속에 살 때는 결코 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번뇌만 없으면 있는 그대로 자성과 하나이기에 그때는 자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번뇌가 생겨날 때, 비로소 그 번뇌에 의지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이 소리는 '물들지 않는 자성'을 확인시켜주는 은혜의 소리다. 번뇌는 그래서 또 은혜가 된다. 번뇌 즉 보리이자, 번뇌 즉 은혜다.

정산종사는 "큰 소견이 열린 사람은 우주 만물을 모두 부처님으로 모시고 때 없이 상주 설법을 듣는다"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3장〉 우주 만물 모두가 때 없는 상주 설법을 해주는 중이다. 치성한 번뇌를 괴로워 말자. 번뇌가 즉 깨달음이다.

/교학대 서원관

[2019년 3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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