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도인가 교당만 다니는 사람인가
참된 종교인의 모습이 교화의 지름길

[원불교신문=김수영 교도] 수년 전의 일이다. 밖에서 요란해진 마음을 미처 진정시키지 못하고 귀가했는데 마침 아이들이 들어왔다. 번거로워지는 것이 싫고, 구업(口業) 짓지 않으려 꽁꽁 묶어놨던 황당했던 마음을, 속사포로 쏟아내며 상대의 옳지 못한 처사를 비난하던 말끝에 듣고 있던 딸이 한마디 했다. "엄마는 교당 다닌다는 사람이 그러면 되겠어?" 아들도 한마디 거들었다. "사서삼경 공부한다는 사람이 그러시면 안 되지요" 아이들의 2연타에 요란했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머쓱했던 기억이 있다.

'아니 지들이 교당을 다녔으면 얼마나 다녔다고 사서삼경은 한 줄도 읽어보지도 않은 것들이' 아이들의 '한방'을 곱씹다가 종교인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인 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의 인격과 도덕적 규준(規準)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었다. 

생각해보면 타 종교인의 불미스러운 일이 기사화 될 때마다 필자 또한 혀를 찼던 기억이 있으니, 나와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종교와 학문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도덕률과 거기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러해야한다는 보편적 당위성의 기대감이 있는 것이다. 그 날의 경험으로 강의시간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어디 가서 〈명심보감〉 배운다는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배운 것을 다 실천할 수 있어서 지행합일이 자신 있을 때 얘기하라고.

필자 역시 배워서 아는 것을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함을 자인하면서 본론을 말하려한다. 교당생활이라고 다르지 않다. 전산종법사가 마음을 잘 쓰자고 신년법문을 내려준 것도, 아직 우리들의 마음 씀씀이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교당 다닌 세월이 쌓여 갈수록 나의 심지는 진실하고 원만해졌는가를 반조해 보게 된다. 특히 교당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행동 하나하나가 그분들에게 원불교의 첫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에 각별히 신경이 쓰인다. 

새 교도 한분 모시고 오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과 공력을 들여야 하는지 알기에, 어렵게 발걸음한 분들이 원불교에 좋은 느낌을 갖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끔은 열심히 나오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연락을 해보면 대부분 일이 있다거나 바빠서라고 하지만, 계속 연락을 하다보면 교도들이 무심코 한 행동에 실망해서, '원불교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는 실망감이 원인이었음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에 섭섭하고 실망해서 안온다고 하면 자신의 옹졸함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처음엔 최대한 말을 아끼지만, 결국엔 기존 교도들의 모습에 대한 실망감이 원불교 교도에 대한 전체 인상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깝다. 

모두가 유념하자는 의미로 새로 온 방문자들이 느끼는 서운함의 사례를 짚어보자면, 첫째는 기존교도들의 기득권 주장이다. 입장료 내고 구입한 좌석권도 아닌데 내가 앉던 자리라고 이미 앉아 있는 사람을 비키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당혹스러울 것 같다. 두 번째는 끼리끼리의 친분과시이다. 교화단원, 혹은 동아리회원 사이에 돈독하게 지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 온 사람에 대해 무관심했다면 그 또한 섭섭하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지난 100주년기념대회 때, 몇 년을 공들여서 어렵게 지인을 초대했는데, 합창석에 앉게 되느라 다른 교도에게 부탁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방문자를 옆에 두고 기존 교도들끼리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잔 건네지 않은 섭섭함 때문에, 다시는 원불교 얘기도 못 꺼내겠다고 토로하던 이웃 교당 교도 경험담도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또 하나는 호칭 문제이다. 새로 온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법명이나 법호 대신 형님, 언니 등의 호칭으로 교도들끼리 하는 대화나, 사회에서의 직함이나 직책을 교당에서 그대로 부르는 것에 대해, 처음 온 사람 입장에서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마음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배운 대로 잘 실행했는지 못했는지 각자 대조해 보면서, 얼마 전에 나왔던 새 교도가 지금 안 나오고 있다면 혹시 나 때문은 아닌지, 우리 단에 실망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아는 것을 실행하는 힘, 지금 필요하다.

/강남교당

[2019년 3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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