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이 절제된 소비와 삶이 있어야
대중의 마음공부·윤리적 소비 필요해

[원불교신문=채일연 교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사람이 숨을 쉬듯 생존을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음식을 섭취해야 하며, 살아서는 먹이를 찾고 구하는 일이 평생의 업으로 따라붙는다. 그러나 하루에 수차례 음식을 섭취하면서도 그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현대인들은 이 음식물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찬수 종교문화원장은 공동저서인 식탁의 영성(2013)에서 '식맹(食盲)'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글을 모르는 문맹이나, 컴퓨터를 다룰지 모르는 컴맹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섭취하는 음식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물건이 어떻게 해서 우리 앞에 왔는지 모를 이 현상이 현대 문명의 비극의 시작점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기르거나 생산하지 않은 여러 단계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음식들은 우리의 윤리적 책임을 희석시킨다.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로 꼽히는 푸아그라는 '살찐 간'이라는 뜻과 같이 정상적인 거위의 간 보다 더 크게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케이지에 가둔 채 강제로 사료를 먹여 사육한 대표적인 동물학대 음식이다. 중국과 아시아 지역에서 고급 식재료로 사용되는 상어지느러미 역시 포획된 상어를 지느러미만 자르고 다시 바다에 집어 던진다. 상어는 부레가 없어 헤엄을 치지 않으면 물에 뜰 수가 없어 바다 속에 가라앉으며 서서히 고통 속에 죽어간다.

고급 요리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접하는 식재료 역시 다른 생명의 고통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계란을 낳는 대부분의 산란계는 A4 한 장보다 작은 공간에서 날개도 펴지 못 한 채 알 낳는 기계로 살아가며, 젖소는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우유의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어미로부터 강제로 분리된다.

이러한 동물들의 고통 때문에 채식을 선택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채식이라고 해서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일의 제왕이라 불리는 두리안의 경우 수요가 늘면서 말레이호랑이 보호구역이 위치한 말레이시아 파항주 라우브의 숲이 두리안 농장으로 바뀌어 호랑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단백질과 지방의 함량이 높아 부드럽고 고소한 맛으로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아보카도 역시 수요의 증가로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산림이 파괴되고 있으며, 멕시코에서는 아보카도 이권을 두고 마약 조직끼리 살육전을 벌이기도 했다.

음식에서 벗어난 이야기이기는 하나 모피 등 동물의 털을 이용한 겨울철 의류의 대안 소비로 신소재 제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신소재 대부분은 석유화학제품으로 세탁과정 등에서 세계인의 골칫거리가 된 미세플라스틱이 배출된다. 이러한 반작용에 대한 이해 없이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택하는 대안적 소비는 덜 직접적인 고통을 초래하는 자기만족에 그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개인적인으로는 윤리적 소비의 첫 걸음은 단순히 덜 잔인해 보이는 물질로의 대체에 있다기보다 탐욕이 절제된 소비와 삶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당시 교화부원장이셨던 월산 김일상 교무님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식사 중 "음식을 맛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뜻을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의해 섭취는 하되, 맛에 미혹되거나 욕심에 끌려 불필요하게 취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불필요한 소비들이 넘쳐나고 있다. 또 먹방과 같이 탐욕스러운 소비가 인기 콘텐츠로 소비되기도 한다. 탐욕과 탐욕으로 연결된 소비는 불필요한 고통과 희생을 초래하고 결국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다. 경계를 발견하면 멈추고, 돌리는 것이 마음공부다. 지금 우리사회 역시 탐욕의 소비라는 경계를 마주하고 있으며, 이를 멈추고, 돌리는 대중의 마음공부, 윤리적 소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의도교당

[2019년 3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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