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엔 문턱이 참 높았다. 많기도 많았다. 한옥 구조상 문턱 없는 집짓기가 어려웠을 터. 턱도 높았지만 머리를 제대로 숙이지 않으면 머리를 찧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은 자그마한 방들은 추위를 피하기에 맞춤하고 조용히 잠자고 쉬기에 적당했다. 요즘 건축물엔 문턱이 사라지고 있다. 복지시설, 병원, 관공서 등 공공시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이 쉽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불필요한 장애요소들을 없앤 결과이다. 노약자나 장애인들에겐 꼭 필요하고 반가운 일이다. 고객을 한 명이라도 더 들여야 하는 상업시설도 그렇고 가정집까지 턱들을 없애는 추세다. 

물리적 문턱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 존재하는 다른 문턱들도 사라지고 있다. 자유로운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퇴출되고 있다. 경계를 넘어서 서로 소통하고 연결하며 융합하는 흐름이 대세다. 고립된 것들은 힘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구촌을 거미줄처럼 엮은 인터넷은 더욱 촘촘해지고 4차 산업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을 서로 연결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아마존, 네이버와 같은 소위 플랫폼 기업들은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엮어내는 힘으로 산업과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그 결과 주체와 객체, 수요자와 공급자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신문명이 급속히 열리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개벽을 천명했다. 한마디로 '열어젖히라'는 언명이다. 닫혀 있던 각자의 마음을 열어젖히고,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사상과 제도들도 시원하게 열어젖히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정산종사는 '양 세계는 곧 대낮과 같아서… 문호가 서로 열리게 되고, 서로 만나 넘나들며 활동하는 세상'이라고 했다. 대산종사는 '새 시대는 묵은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서는 때라, 새 기운으로 새 역사가 열려가므로 정치·사상·경제·종교·문화·예술 등 각 분야에서 묵은 것들은 물러나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단언했다.

전산종법사는 취임 일성으로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하자'고 했다. 개벽에 앞장서자는 또 다른 표현이다. 현재 교단은 어떤가. 일체 중생을 위해 제도의 문호는 활짝 열려 있는지, 부지중에 고집하고 있는 교단의 문턱들은 없는지, 불필요한 폐쇄적 제도와 조직문화는 없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예컨대, 교무가 혼자라서 거의 늘 닫혀있는 교당의 문은 언제쯤 열릴 것인지. 정녀가 아니면 출가를 하기 힘든 남녀 차별적 제도는 언제까지 온존시킬 것인지.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지자본위의 교단운영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자. 교단 곳곳에 남겨진 문턱들이 개벽에 저항하고 있다. 어쩌면 이 문턱들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 아닐까. 문호를 개방하고 문턱을 없애는 정도가 아니라, 문을 통째로 떼어버린다는 각오로 개벽에 앞장서자.

소태산 스승님의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제자들이 되자. 대각의 달, 개벽의 달 4월이다.

[2019년 4월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