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 전성완 종사

로산 종사는 빚지지 않는 보은생활로 불연을 쌓고 일원의 진리를 확고히 깨닫고자 쉼 없이 정진하고 있다.

[원불교신문=안세명] "언젠가 30계문을 암송했더니 자꾸 막혀서 '이거 큰일이다' 싶었어요. 요즘엔 계문과 솔성요론을 함께 외우며 대조하고 있지요." 나이가 들수록 잠이 없어지니 정신수양 공부에 매진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는 로산 전성완 종사(露山 全性完·96세). 

그는 매일 2시간 이상 새벽 정진에 공들이고 있다. 비록 눈과 귀까지 어두워져 생활하는데 불편이 막심하지만, 오직 영생을 깨치고 싶은 일념뿐인 전 원로교도는 이 또한 일심양성의 기회로 삼는다.

대종사 친견제자, 초창기 기억 또렷
전 원로교도는 1924년 부친 혜산 전음광 대봉도와 모친 동타원 권동화 종사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일제의 혹독한 압박과 감시 속에서 교단 초창기 외교를 담당했던 부친과 '재가교무 1호'라 불릴 정도로 일원대도의 투철한 실천자였던 모친의 은덕으로 어린 시절부터 중앙총부 구내에서 생활할 수 있었고, 자연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선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각 교당과 기관을 다니며 숱하게 추모담을 했지만, 그가 본 대종사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지극한 공심이다. 대종사께서는 사(私)란 추호도 없으셨다. 심지어 지방의 제자들이 대종사께 올린 과일도 드시지 않고 잘 보관하셨다가 손님이 오면 접대하라고 내주셨다. 둘째는 제자들의 세정(細情)을 극진히 살펴주신 자비심이다. 대종사께서 꾸중을 하실 때에는 야속한 생각이 일어났지만 꼭 다시 부르시어 전에 있었던 잘 한 일도 말씀하시며 다독여주셨기에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꾸지람이 꾸지람으로 그치지 않고 뒤에 꼭 풀어주시는 심법은 지도인들이 본받아 실천할 일이다. 남과 척 짓지 않는 것이 무척 잘 사는 길임을 깨치게 하셨다. 영생의 스승인 대종사는 그의 가슴에 그렇게 각인돼 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절대계를 깨쳐라
전 원로교도의 관심사는 '영생에 대한 확고한 깨침'이다. 일심공부 하나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매 순간을 적공의 기회로 삼고 있는 그는 불연(佛緣)을 두텁게 하는 것이 다음 생에도 이 공부를 떠나지 않는 길임을 확신한다. 교단과 인류, 가정을 위한 기도를 잠시도 쉴 수 없는 이유다.

그는 "원불교에는 크게 두 길이 있다. 바로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이다.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에는 교도들이 아주 열성적인 걸로 보이는데,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는 그만 못한 것 같다"며 "영국의 대처수상이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에서 행동이 나오고, 행동에서 습관이 나오고, 습관에서 인격이 나온다' 했는데, 나는 '육근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에서 관념이 나오고, 관념에서 행동이 나온다'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념은 말에서 오염이 되고, 그 말은 생각에서 오염이 되고, 그 생각은 육근에서 오염이 되므로, 그 육근을 초월하려면 절대계(絶對界)로 가야한다"고 일원의 절대 자리를 깨치려는 그의 간절한 열망이 내생의 숙제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총부에서 선을 날 때면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진공묘유(眞空妙有)'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듣게 됐다. "진공은 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 속에 묘하게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묘유다" 뜻은 모르고 그 말만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공부하다 보니, 진공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속이 아무리 텅 비어 있어도 그것은 진공이 아니라 무(無)에 해당하는 무기공(無記空)이었다. 진공이란 것은 무를 초월한 참 진공이다. 무를 부인하면 유(有)가 되고, 유를 부인하면 무가 되는데, 이것이 상대계에 머문 생각이다. 불법은 무를 부인하면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닌 무다. 또 그것을 부인하면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그것이다. 무한히 무가 계속되는 것이 불교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무를 초월한 자리가 진공묘유다. 유를 초월하면 묘유고, 무를 초월하면 진공이다. 오랜 시간 궁굴려 깨친 그의 한 소식이다. 이 자리를 '절대계'라 하며 관조로써 들어가야 한다.

"초창기 선진들은 순진하다고 할까. 도를 깨닫고자 하는 한 생각에 몰입 돼 있었다. 깨치고자 하는 열정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정신이 얇아졌다"며 "김남천 선진은 수시로 대종사를 뵙고 '도는 이런 것이 아닙니까?' 물으면, 대종사께서는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참구해 보거라'고 말씀하셨다."

대종사 게송에 '지극(至極)하면'이 곧 절대계의 소식이다. 언어도단하고 유무초월한 자리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다가 지극해서 가는 곳, '귀일(歸一)'이 구공(俱空)과 구족(具足)이며, 구공의 공은 진공이요, 구족의 족은 묘유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공심과 자비로 뭉친 어른
상대계 머물지 말고, 절대계 진공묘유 소식 알아야

생사 해탈 법문과 내생 서원
전 원로교도와 천도법문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가 7세 때 서중안 선생의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 방에 앉아 있게 됐다. 총부 남자 선생 다섯 분이 계셨는데 그 중 한분이 무엇인가를 읽기 시작했다. "서중안아, 정신을 차려 나의 말을 잘 들으라." 그때 그는 깜짝 놀랐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어른에게 반말조로 마구 해라 한다"고 여쭈니, 어머니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말씀하시니까 해라하는 것이다"고 답을 주셔서 이해가 됐다. 그 뒤로는 새벽 독경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천도법문을 봉독하고 있다. 천도법문이 그의 마음을 환하게 열리게 해준 것이다.

그는 "내생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우리는 영생을 산다. 과거로도 영생이요, 미래로도 영생이다"며 "과학적으로 증명 못하면 가설로 두기도 하는데, 영생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증명을 못해도 불조의 혜안으로 보시고 가르쳐 주신 바를 믿고 따르면서 스스로 지혜를 닦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불연을 놓지 않고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있다면, 고통 속에서 헤매는 중생들과 함께 그 길을 가겠다는 서원이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평생 인재양성 힘써 온 '학교 전무출신'
전 원로교도는 원광중·고에서 7년, 원광여자중·고등학교에서 19년, 원광보건전문대학에서 15년을 근무했다. 모두가 개교한 직후 봉직했으니 그 수고로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는 봉급을 활동의 대가로 여기지 않고, 생활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근무한 때도 있었다. 퇴근 후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출근해서 학교에서 밤늦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살폈고 쉬어도 학교에서 쉬고 놀아도 학교에서 놀았다. 방학이나 휴일도 대부분 학교에 나갔다. '부처님 사업에 흠집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염려가 그를 지배했다. 이러한 그를 의타원 이영훈 종사는 '학교 전무출신'이라 불렀다.

"지금도 후회 없는 삶이었다. 나는 원불교를 만나 다시 없는 은혜를 입었으니, 그 빚을 갚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며 "학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잘 되고 못 되는 데가 아니다. 내가 몸 담았던 그때 모든 교사들이 참으로 우수했고, 헌신적이었으며 단합이 잘 됐다"고 공을 전체로 돌렸다.

그때 그가 세운 다섯 가지 공부표준은 '선공후사(先公後私)로 일관하는 생활, 무관사에 동하지 않는 생활, 보은생활로 빚지지 않는 생활,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는 공부, 우주의 진리를 확고히 깨치자'이다.

불연을 굳게 하고 서원을 뭉치자
전 원로교도는 "나는 저승의 통행권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다. 끝마무리를 잘 해야 할 입장이다"며 "생사해탈은 했다고 생각하는데 옛 고승들은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 '숨 넘어 갈 때 보자' 했다. 더욱 더 닦아야 한다. 진리 탐구는 영생의 과제이다. 대종사께서는 대각했을 때 그 황홀함이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 그런 경지를 겪어보지 못했으니 더욱 불연을 굳게 하여 영생의 과제로 삼고 참구해 나갈 뿐이다"고 말했다.

오늘도 그는 100년성업 정진기도문으로 교단의 발전과 6남매 가족들의 건강과 보은을 염원하며 기도한다. 평생을 반려자로 함께한 회타원 정도인 원로교도의 깊은 미소가 그의 후광을 따스히 비춘다.

〈약력〉
-로산 전성완 종사

 출가위 수훈
 영산지부 서무부 서기, 부장 겸 학원교무,
 학원교육과 서무행정 담당.
 원광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무주임
 원광여자중고등학교 교감 및 부교장
 원광보건전문대학 학장

[2019년 4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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