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정전〉 수행편 계문의 정신적 원류는 대승불교의 보살계다. 보살은 자신만을 위한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뭇 중생들과 함께 깨달음을 지향하며, 그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자비를 실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불자를 말한다.

이러한 보살에게 수여하는 계가 보살계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계를 받기 위해서는 부처님 재세 시만큼 철저한 수계법(受戒法)을 거쳐야 한다. 그만큼 계를 받는 자는 마음의 각오가 확고해야 한다는 의미다. 조사들이 계를 중시한 것은, 한 번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서원하고 받은 계의 무게가 우주만큼이나 무겁다는 것을 늘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에 비추어 〈정전〉의 계문은 어떠한 성격과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는 법신불 일원상진리의 구현이다. 수많은 전생에 쌓아온 업장을 녹이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기 위한 것이다. 그 큰 길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삶의 표준을 향한 계율의 실천에 있다. 일원상과 같은 인품을 갖추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이다. 계문은 일원상의 신앙이자 수행이 삶 속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둘째는 삼학의 병진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에서 "취사는 계며 솔성"(교의품 5장)이라고 설한다. 계는 정신수양과 사리연구가 함께 실천되어져야 하며, 삼학공부의 최종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선법의 백미는 무시선이지만, 이 무시선 또한 매순간의 삼학공부가 기반이 되어 있다. 계문 하나라도 삼학으로 삶의 본질을 꿰뚫지 않고는 운명을 바꾸는 실천으로 나아갈 수 없다. 셋째는 일상의 보은행이다. 내 스스로 보통급, 특신급, 법마상전급의 계를 단계적으로 받아 실천하겠다는 것은 불법에 대한 믿음을 확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삶의 근거인 법신불사은의 은혜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고, 불도를 통해 모든 이웃에게 보은 회향하겠다는 서원과 다르지 않다.

결국 계문은 불법을 삶 속에서 구현하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다. 정산종사는 〈정산종사법어〉에서 "계율은 수행자의 생명이요, 성불의 사다리"(무본편 25장)라고 설한다. 따라서 대승보살계 정신을 계승한 계문은 인류 전체의 운명 전환과도 깊이 관계된다. 불법이 뛰어난 점은 나로부터 새롭게 변화하겠다는 수행에 있다. 땅 위에 진리는 차고 넘치며, 이미 임계선을 넘은 문명의 병폐에 대한 처방은 산처럼 쌓여 있다. 이를 누가 해결할 것인가. 우리 자신 외에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계문 하나라도 실천하여 하나뿐인 이 지구를 구하는 길에 나서는 길 외에는 없다.

계문이 문명의 치유를 위한 인간 개개인의 윤리적 지침이자 행동강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문 한 조목 한 조목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지구 문명의 한계를 우리 자신부터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실천의 표현이다.

계문은 우리가 실천하는 모든 교법과 함께 한다. 즉, 신앙과 수행 모든 측면에서 이 계문과 짝을 이루지 않는다면 문자 그대로 삶과는 동떨어진 '보기 좋은 납도끼'에 불과하다. 계문은 불보살의 지위를 영원하게 유지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계는 원효대사가 설파했듯이 일심과 자비심의 구현에 다름이 아니다. 

일심은 곧 불심이며, 불심은 자비심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불제중·제생의세의 길이 먼 곳에 있지 않다.

/원광대학교

[2019년 4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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