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다림실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정화원 1층을 샅샅이 뒤져도, 다림실을 못 찾겠다. 분명히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다. 물론 내가 치명적인 '길치'라 그렇다. 방향감각이 평균치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처음 부임해 미로 같은 복도를 얼마나 헤매고 다녔던가. 옷을 들고 다리미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다림실을 발견했다.

기쁨도 잠시, 다리미 옆 분무기를 보니 '비상이다! 물이 별로 없다!' 분무기에 물이 별로 없을땐, 여간 신경 써서 분무질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이 끌어올려지는 쪽으로, 바닥에 깔린 물을 기울여 모아야 한다. 그 각도를 유지한 채 분사하는, 고난이도의 스킬이 필요하다. 또 물이 별로 없기에 물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과제도 있다. 다려야 할 옷을 명확히 분석한다. 금방 견적이 나왔다. '이 부분은 물을 안 뿌리고 다려도 된다. 물을 아껴서 저 쪽에 쓰자' 냉철한 분석을 마치고, 실행에 옮긴다. 적은 물로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기 위한 분투가 시작됐다. 

분무기를 360도 휙휙 돌려가며 물을 한껏 모아, 현란한 스킬로 다림질을 빠르게 마쳤다. 성공이다. 경계가 있었기에, 결과가 더욱 뿌듯하다. 가뿐한 마음으로 빳빳해진 옷을 들고 돌아서는 찰나, '빈 분무기'에 눈길이 멈춘다. 눈길과 함께, 마음도 멈췄다. '저 분무기에 물을 채워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섬광 같이 떠오르는 한 자각! '뭔가 엄청나게 잘못되었다' 그렇다. 시작부터 잘못이었다. 

물이 적은 것을 확인한 순간, 물을 채워왔으면 된다. 그렇게 온통 신경을 써가며, 적게 남은 물로 다림질 할 필요가 '애초에' 없었다. 이 분무기가 내 것이었으면, 내가 그랬을까? 어차피 다음에도 내가 쓸 것이니 당연 물부터 채워오고 시작했을 거다. 내 물건들엔, 내가 그런다. 공동의 물건이기에, 내 것이 아니기에 채워 올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더 섬뜩한 사실은 '적게 남은 물'로 다림질을 잘하는 스킬을 내가 어디서 배웠냐 하는 거다. 공동생활하며 배웠다. 이 말인 즉, '셀 수 없이 많은 날' 내가 물을 채워오지 않고, 다림질을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같이 물이 적은 날 여지없이 물을 최소한도로 사용하고 그 자리를 떠났던 기억이 속속 떠오른다. 머리로는 공심이 있는데, 작은 실천 하나도 그에 못 미친다. 공심을 모아놓았다, 어느 큰일에서 크게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이소성대다. 작은 일에서부터 나의 공심을 반조해야 한다. 작은 일에서 공심이 훈련되어야 한다. 대산종사는 "노래도 듣기만 하고 직접 불러 보지 않으면 막상 부르려 할 때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이 훈련법도 실지훈련을 통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힘을 얻을 수 없나니 이는 우리가 크게 주의해야 할 바라"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어〉 훈련편 27장)

먹는 것 하나에도, 욕심이 가득하면 언제 공심을 기를 것인가. 빈 곳을 채워놓기 보다 채워진 것을 쓰기 바쁘다면 공심은 또 언제 기를 것인가. 관념으로 하지 말고, 실지로 하자. 공심도 훈련해야 한다.    

작은 일을 결코 작게 여기지 말자 다짐한다. 이 부끄러움을 오래 기억하자.

/교학대 서원관

[2019년 4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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