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장자〉 '소요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지창창 기정색야(天之蒼蒼 其正色耶)'.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그 색이 정녕 푸른색인가?' 하는 뜻이다. 우리가 하늘을 푸르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지, 정작 하늘은 과연 푸르다고 할 수 있는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내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은 자아 밖에 외부세계가 존재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만약 외부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실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눈앞에 드러나는 세계는 내 마음에 의해 재구성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당신 앞에 펼쳐진 세계,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책장의 감촉과 적당한 소음과 익숙한 냄새, 이 모든 것은 세계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왜곡되고 재구성된 모습일 뿐이다. 나는 세계의 '실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기관과 뇌가 그려주는 세계의 '그림자'를 본다.'(〈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채사장)

하늘이 푸르다는 건 하늘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의해 재구성된' 인식일 뿐이다. '그 색이 정녕 푸른색인가?' 하고 묻는 것은 '푸르다'는 생각이 하늘의 실체와 상관없는 나의 고정관념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다.

'물론 내 외부에 세계도 없고 타인도 없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눈앞에 드러난 세계와 타인이 적어도 실제의 세계와 타인과는 큰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그림자에 가깝다'고 한 위의 책 저자의 말을 다시 인용할 때 거듭 나오는 말은 '그림자'이다. 만약 '눈앞에 드러나는 세계'가 '그림자'라면 우리는 결코 세계와 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는 타인에게도 닿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섬'인 것이다.

우리가 왜 선을 할까? '내 마음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 또는 자연을 넘어서, 세계 또는 자연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함이다. 우리의 인식과 생각과 판단과 평가를 뛰어넘어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하는 실체를 만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것이다.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기 위해, 내 고정관념으로 인해 속박된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림자처럼 왜곡된 대상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원상'을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다. '여여자연'한 무량세계와 진실로 마주하기 위해 나의 '분별성과 주착심'을 놓고 수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한 무량세계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세계와 자연, 그리고 타인을 내 마음으로 재구성하지 않고 본다는 것이고, 그래야 그 대상의 실체에 가닿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내 습관과 업력에 끌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각자의 성품을 오득한다는 것이고,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고, 집착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지창창 기정색야'의 물음을 던진 문제의식이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한 '무량세계'와 이어져 있으니, 끊임없이 '실체'에 가 닿기 위한 걸음걸음이 그래서 참으로 소중하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4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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