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를 보고 부분에 치우침 없이 변화를 알아채야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지도인은 공부인이 자신을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 유무의 이치로 원만하게 보도록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해오는 공부인이 지도인에게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또한 공부인의 질문에 지도인의 진리적 해석이 더 선명해집니다. 지도인과 공부인은 마음을 공부하며 영생을 함께 걷는 도반입니다. 

▷공부인: 한의원에서 야간과 일요일에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씁니다. 며칠 전에 접수실 직원이 찾아와 업무를 조정해달라고 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물리치료실 직원에게 해달라고 했더니 자기에게 욕을 했다고요. 접수실 직원은 5년 이상 근무했고 성실한 편이라 물리치료실 직원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그 상황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물리치료실 직원이 화가 날만 하더군요. 마음을 공부하기 이전이라면 물리치료실 직원이 욕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바로 잘라버렸을 겁니다. 욕하는 것은 나쁜 거니까요. 그런데 두 사람의 마음을 보고나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단정해버릴 수 없었습니다. 원장으로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도인: ○○ 공부인의 혼란을 축하드립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내 경험과 생각에서 진리적 시각으로 바뀌려는 징조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어리석음(愚)을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연사조). 마음을 사용할 때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 세상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리연구의 목적). '이 세상은'에 다양한 것들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가나니, '내 마음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가나니, '우리 가족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가나니, '우리 직장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가나니. 이렇게 모든 것이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바라볼 때, 사람을 대할 때, 일할 때 나, 그 사람, 그 일의 전체(大)를 못 보고, 부분(小)이 전부인 줄 알고, 변화(有無)를 알아채지 못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인: 그렇다면 어떻게 경계를 대할 때마다 대소 유무, 전체와 부분과 변화에 대조할 수 있을까요?

▶지도인: 정산종사께서는 "참다운 자성 반조의 공부는 견성을 하여야 하게 되지마는 견성을 못한 이라도 신성있는 공부인은 부처님의 법문에 의지하여 반조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바, 그 요령은 정전 가운데 일상수행의 요법을 표준하여 천만 경계에 항시 자성의 계 정 혜를 찾을 것이요"(〈정산종사법어〉 무본편 27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일원상의 진리, 대소 유무의 이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대조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은 전체(大)입니다. '없건마는'은 모든 것을 다 품고 있지만 아직 싹을 틔우지 않은 땅과 같습니다.(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는 부분(小)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봄이 되면 새싹이 솟아오르듯이 우리의 마음도 경계를 대하면 다양한 마음들이 나옵니다.(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그 요란함(어리석음,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혜, 계)을 세우자'는 변화(有無)입니다. '없애는 것'이 아닌 '없게 하는 것으로써'는 마음이 변화하는 이치를 알아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마음을 믿고 지켜보는 것입니다.(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

▷공부인: 물리치료실 알바는 원래 욕해야 한다, 안해야 한다는 분별이 없건마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경계를 따라 욕한 것이군요. 물리치료실 알바를 자를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불러 서로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해야겠네요.

/교화훈련부

[2019년 4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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