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교무님, 이혜설이 누구예요?" 택배에 적힌 이름을 보고, 예비교무가 묻는다. "응? 나!!" "그런데 왜 이혜설이예요?" "택배를 처음 주문한 날이 서원관 이사 오던 날이었거든요. 급히 적느라, 오타 난거예요" '이혜성'으로 적어야 하는데, '이혜설'로 적는 바람에 이혜설에게 택배가 계속 온다.

함께 근무하는 교무는 왜 안 고치냐고 묻는다. "어차피 이제 이혜설이래도, 이혜성인 것 다 아니까요" 내 대답에 교무는 의아하다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아니, 완벽주의자면서 그게 안 거슬려요? 처리할 일은 그리 '안'하면서? 나는 내가 다 거슬리던데?" 

그렇다. 평소 완벽주의 기질이 강해, 미리 준비하고 누수가 생기지 않게 최대한 노력한다. 그러니, 함께 근무해 온 사람의 관점에선 이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일할 때 보이는 맥락과 실수를 수정하지 않는 모습은 매치가 안 될 거다. 물론 공중의 일이면, 피해 가지 않게 실수를 금방 수정했겠지만 이건 다르다. 

난 지금 실수를 기꺼이 바라보는 중이다. 이것이 원불교에 와 마음공부하며, 가장 크게 변한 부분이다. 매번 '이혜설'에게 온 택배를 받으며 싱긋 웃는다. 여기엔 타인의 시선은 끼어들어올 틈이 없다. 내 실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힘이 놀랍게도 생겼다. 이는 해방을 의미한다. 이제 비로소 타인의 실수에도 따뜻한 시선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잘했다, 못했다'를 신경 쓰거나 혹 '누가 잘했다, 못했다'에만 신경을 쓰며 살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교학과 시절의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만 괴로워했을 뿐 아니라, 타인 앞에서 한 작은 실수 하나에도 잠 못 들곤 했다. 좌선주례 하던 날, 목탁을 느리게 쳤다는 도반의 지적에 그 밤 내 후회하고 괴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실수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날카로운 가시는 물론, 타인에게 그대로 반영됐다. 내 실수도 남의 실수도 용납 되지 않으니 그 삶이 얼마나 파란고해였을까. 소태산 대종사는 나를 위해 오셨다. 파란고해의 이혜성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해주시러 오신 것이다. 그 덕을 나는 보았다.

정산종사는 '우리는 먼저 모든 인류와 생령이 그 근본은 다 한 기운으로 연결된 원리를 체득하여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일체의 인류와 생령을 하나로 보는 큰 정신을 확립하자'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도운편 38장)

이는 나와 타인이 둘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나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근저에 타인에게 사랑받아야하는 욕망이 깔려있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실수에는 크게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타인 앞에 드러나는 실수만 괴로워함을 발견한 것이다. 헌데 법문처럼 나와 타인이 둘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잘 보이고 싶은 나'는 잘 보여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 힘을 잃는다. 더군다나 하나이기에 '나'도 없는데, '잘 보여야 할 나'는 또 어디 있겠는가. 너와 내가 하나이니 괴로움의 근원이 사그라진다. 타인과 내가 하나라는 통찰은 결국 나에게 자유를 선사한 셈이다. '이혜설' 앞으로 택배가 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또 빙긋 웃었다.

/교학대 서원관

[2019년 4월12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