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강보광 원로덕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몸은 천하의 뒤에 서서 일하고 마음은 천하의 앞에 서서 일할지니라.' 고향 죽마고우의 인연으로 대도정법을 알아본 후 30여 년을 흐트러짐없이 공심으로 일관해 왔던 진산 강보광 원로덕무(69·眞山 姜保光).

그는 어려운 생활을 겪었기에 자수성가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사업이 번창했음에도 출가하기로 약속된 날이 다가오자 아무런 미련없이 처분하는 강단을 보였고, 이러한 신의는 퇴임하는 날까지 일관해 전무출신으로서 보여준 큰 사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수성가와 양복점
전북 김제군 금산면 원평리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대를 다녀온 후 전주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가 고향 원평에 추석 명절을 지내러 내려갔을 때 우연히 선배가 운영하는 자전거 가게에 들렸는데, 고향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에 "자전거 가게 한쪽을 막아줄터이니 사업하나 해봐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선배가 장난삼아 해본 말인 것 같아 "그런다면 한번 해보겠다"고 응수했다.

추석 명절 삼일이 지나고 다시 찾아가보니 목수들이 와서 정말 벽을 막고 있었다. 그는 선배가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모습을 보고 '대도시에 나가서 자수성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말했다.

"선배가 이렇게까지 해주니 고향에서 딱 10년 사업해 보겠다." 그가 시작한 사업은 양복점이었는데 의외로 괜찮게 장사가 잘 됐다.

원평교당 청년회 결성
그가 한창 자리잡고 있을 즈음 어렸을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찾아왔다. "그때 친구가 원평교당에 다니고 있었어. 그 친구가 '앞으로 교단에 청년회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면서 '원평교당에 청년회 결성을 해봐라'는 대산종법사 하명에 걱정하다가 나를 찾아온 거야."

그는 별다른 마음없이 그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고 평소 알고 지내던 선후배 20여 명을 모아 원평교당에 소개해 청년회를 결성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그는 자수성가에 대한 꿈이 있었기에 친구에게 "10년 동안은 사업에 전념하기로 뜻을 세웠으니 여기까지만 돕겠네"하고 부탁을 들어주면서 조건을 걸었다.

그런데 그가 교당으로 인도했던 선후배들이 매일같이 하나둘 찾아와 교당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번갈아 가며 조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법회는 나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법회에 참석하며 당시 청년담당이었던 김민연 교무의 설교를 듣다보니 그도 모르게 점점 원불교에 빠져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원평 구릿골에 정양중이었던 대산종사를 모시고 청년들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하나씩 찾아가는 계기가 됐다.

청년회 활동이 잘 되어가면서 전국교당 교무들이 청년회 결성 모범사례로 원평교당에 견학올 정도였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교당마다 청년회 결성이 한창 추진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청운의 꿈을 접고
그러던 어느날 당시 원평교당 주임이었던 이양신 교무가 "대산종법사께서 총부에 가서 살아보라고 하신다"는 말씀을 전해듣게 된다. 총부에 가서 간사로 살아보라는 말씀이었지만, 간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그저 '총부에 가서 살면 큰 인격을 갖춘 스승님들을 모시게 되니 만분의 일이라도 닮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고는 10년을 작정하고 시작했던 양복점을 총부에 들어갈 시기가 돌아오자 미련없이 정리했다.

"10년을 조금 못 채웠지. 정말 잘 나가던 양복점을 다 정리했어. 재봉틀은 총부 식당에 가져다 드렸고." 그렇게 원평에 처자식을 남겨둔 채 그는 가방 하나만 메고 총부로 떠났다.

도중하차란 없다
원기70년 재무부에서 간사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재무부 버스를 비롯해 교정원장·공익부·영모묘원 차를 운전하는 기사들과 함께 생활했다. 당시 이들이 강이중, 고도길, 이인상, 이진국, 장영근, 정경식 등이었는데 모두 공동 서원해 원기79년 함께 출가했다.

"그렇게 출가까지 생각하는 데에는 이양신 교무와 김민연 교무의 도움이 컸어. 총부에 몇 개월 살다보니 내가 자수성가하기 위해 사업하려고 했던 이유가 행복해보려고 했던 것임을 깨달았지. 그런데 나는 이미 여기서 이 법을 배우면서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나니까 그런 마음들이 자연히 놓아지더라고."

서원과 신심이 일찍부터 철들었던 그는 혹여나 어려운 간사생활로 퇴굴심이 일어날까 걱정해 찾아온 이양신 교무에게 "솔성요론에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저는 원불교를 믿으러 온 것이지 사람만 믿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도중하차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마십시오"라고 도리어 안심시키기도 했다.

수염에 붙은 불 끄듯이
원기80년 중앙중도훈련원으로 부임받은 그는 법타원 김이현 원장을 모시고 살았다. 어느날 김이현 원장의 "저녁에는 식구들끼리 공부하자"는 말씀을 듣고, '덕무가 해야할 일이 산적한데 내 세정을 잘 모르시나'하는 마음에 "원장님 저는 금생에는 복만 짓고 다음 생에 정식으로 공부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김이현 원장은 "그렇게 하세요"라며 더 말씀이 없었다.

너무 쉽게 승낙한 원장님 말씀에 서운한 마음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득 대종사 말씀이 떠올랐다.

"대종사께서 남자는 수염에 붙은 불 끄듯이, 여자는 머리에 붙은 불 끄듯이 공부하라 하신 말씀이 떠오르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다음날 바로 원장님께 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훈련원 식구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지."

그는 29년간 중앙중도훈련원에 근무하면서 김이현 종사를 비롯해 혜타원 오희원, 항산 김인철, 관타원 이혜정, 경산 장응철, 전산 김주원, 종타원 이선종, 왕산 성도종 교무 등 여덟 분의 원장을 모시고 근무하고 올해 퇴임했다.

퇴임소감과 무아봉공
그는 퇴임 소감을 밝혔다.

"살아온 동안 퇴임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도 않고 이제까지 달려왔다. 4살 때 아버지께서 열반하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막둥이로 자라면서 동네에서 보기 드문 효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커왔던 기억이 나. 그런데 어머니께서 열반하셨을 때에 내가 잘해드린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고 잘못하고 아쉬운 생각만 났듯이, 막상 퇴임하고 보니 지난 세월 좀 더 잘할걸 하는 아쉬움이 크지. 어머니께 입었던 은혜가 큰 것처럼 지난 29년동안 정신적으로 낳아주고 길러주신 큰 은혜를 입은 곳이 중앙중도훈련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크다."

그는 현재 1년을 더 중앙중도훈련원에 근무하며 그의 후임인 박정묵 덕무에게 훈련원의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인계 지도하는데 힘쓰기로 했다.

"퇴임할 시기에 맞춰 후임이 나타난 것은 진리의 조화가 소소영령하기 때문이라 생각해. 지금까지 중앙중도훈련원이 있기까지 그동안 많은 정성과 일들이 있어왔기에 하루이틀만에 인계인수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야. 다행히 내 자신이 아직 건강할 때 1년동안 함께 일하고 가르치면서 후임도 잘 적응하고 나도 후회없이 모든 업무를 인계하고 싶어."

원기91년 진산이란 법호를 받고 그 기념으로 당시 장응철 원장에게 받은 '무아봉공' 법문이 영생의 표준이라는 그는 내년부터는 그가 필요한 곳이면 어느 곳이든 달려가 무상보시로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함께 밝혔다.

[2019년 4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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