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틱낫한 스님의 책에서 읽었다. '이 한 장의 종이 안에서 구름이 흐르는 것을 분명히 보는가.' 그 날 이후 난 종이를 볼 때마다, '구름을 떠올리는 통찰을 할 수 있는가?' 때때로 마음을 멈춘다. 종이 한 장만 바라보면 종이는 다만 종이지만, 구름이 없다면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무는 자랄 수 없고, 나무가 자랄 수 없으면 종이를 얻을 수 없기에 '한 장의 종이에서 구름을 보는 것'이다. 

'흐름' 혹은 '변화'로 보는 통찰. 경계가 없을 때는 분명 가능한데, 경계 안에서 이 통찰을 찾기 쉽지 않다. 작년에 나를 흥분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따뜻한 성정은 못 되도, 이성적인 편이라 '폭발'할 만큼 화나는 일은 별로 없기에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상대에 대해 통 '상식'선에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격하게 말을 이어가는데, 도통 남의 말을 끊는 법이 없는 원장님이 한마디 한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을 거야" 아니, 지금 내 말이 틀렸다는 말인가? 그의 잘못이 명백하단 말이다. 답답해진 나는, 원장님의 말에 불쑥 날카롭게 대꾸한다. "그 행동이 이해가 된다는 말씀이세요?" 원장님은 담담하다. "당연히 이해가 되지. 물론 전제가 있어. 그 일을, 그 일로만 놓고 보지 않으면 이해가 돼" 머리를 한방 맞은 것 같았다. 현상만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도, '흐름'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는 조언이다. 

그가 '그리 판단하고 그리 행동'하게 된 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는, 어떤 상처나 어떤 계기가 분명히 있으리라는 통찰이다. 종이 안에서는 구름을 보고 싶어 하면서, 누군가의 삶은 '흐름'으로 보아주지 않는 나를 목격한다. 누군가의 행동을, '그리 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으리라 믿어주지 않는 거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친한 도반이 잘하는 말이다. 의지하고 기대는 일을 가장 못하는 나를, 굳건히 살아야 한다고 늘 담금질만 하던 나를 열어준 도반이 있었다. 그 도반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이든 하게 된다. 그 도반은 따뜻한 눈으로 줄곧 이렇게 말한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어떤 못난 나'도 이해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 행동하고, 그리 생각하게 된 데에 '반드시 이유가 있으리라'는 신뢰가 전해져, 마음이 녹아나는것이다. 

견고한 마음의 벽도, 격랑 같은 감정의 폭발도 '이유가 있다'는 통찰 하나면, 극복이 가능하다. 대산종사는 '저쪽에서 감정이 폭발하고 서운할 때에는 이쪽에서 후퇴하고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왜 그러는가를 여유 있게 연구해 보아야 한다. 알고 보면 복잡한 일이 있다든지 정신에 여유가 없다든지 몸에 탈이 생겼다든지 계절을 탄다든지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7 법훈 266)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예까지 자상히 밝혀주었다. 현상을 '흐름'으로 바라보는 통찰이 가능하다면, 이해되지 않는 일은 없을 거다. 물론 이 말씀을 실천하려면 그 상황에서 '후퇴하고, 대응하지 말기' 일단 멈춤이 선행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잊지 않아야겠지만.

[2019년 4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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