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려워하는 마음이 깨어있게 하고
종교적으로 성숙시키는 은혜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지도인은 공부인이 자신을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 유무의 이치로 원만하게 보도록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해오는 공부인이 지도인에게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또한 공부인의 질문에 지도인의 진리적 해석이 더 선명해집니다. 지도인과 공부인은 마음을 공부하며 영생을 함께 걷는 도반입니다. 

▷공부인: 직장 동료가 업무 능력이 떨어지고 뭔가 진실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친한 친구에게 얘기했습니다. 뒷담화를 하고 나니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사무실에서는 잘 지내면서 뒤로는 헐뜯는 것 같아서요.
▶지도인: 뒷담화 공부를 했군요.

▷공부인: 뒷담화가 공부라니 너무 억지 아닌가요?
▶지도인: 저는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었는가가 중요하거든요. ○○공부인이 뒷담화를 하고 일어난 마음을 놓치지 않고 공부하고 있으니 정말 반갑습니다. 
제 마음을 보면 일단 비난하는 에너지가 나오고 나서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법문을 찾더군요. 내 마음에서 경계를 따라 비난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진리로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그래서 내가 비난하는 거라고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거죠. 
비난하는 것이 100% 인정이 안 되는 이유는 '비난하면 안 된다'는 전제 때문입니다. 도덕적 전제에 잡히면 사실적으로 일어나는 내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비인간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래 비난하는 사람이다, 아니다하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비난하는 마음이 있어졌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일원상의 신앙'에서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와 함께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인 동시에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경계를 따라)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난다는 것을 믿어야 원만한 신앙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공부인: 그렇군요. 경계를 따라 일어난 착한 마음만을 진리로 믿고, 경계를 따라 직장 동료를 비난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찜찜하고, 제 비난을 합리화하려고 했군요. 제 비난을 합리화하려고 하다 보면 직장 동료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저는 피해자 이미지로 꾸미게 되겠어요.
▶지도인: 맞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성품은 작용하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수심결〉 5장)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 작용을 외면하거나 죄악시하면서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죄악시하는 종교는 도덕적 틀에 갇혀 인간의 삶 전체를 신앙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성만 죽일 뿐입니다.
성품이 정(靜)하면 선도 없고 악도 없고 그 없다는 분별조차 없지만, 성품이 동(動)하면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해서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르고 착하고 화나고 갈등하고 비난한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대종경〉 성리품 2장) 이 모든 것이 진리 작용이고, 일체 중생의 본성인 것을 신앙하고 공부 삼는 것이 전체 신앙이고 원만 신앙입니다.

▷공부인: 하지만 경계를 따라 제가 엄청나게 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두렵습니다.
▶지도인: 저도 항상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이 두렵습니다. 아마 평생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워하는 마음이 저를 깨어있게 하고, 종교적으로 성숙시키는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공부를 계속하게 될 테니까요. 
마음 작용을 공부하는 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 공부입니다. 부처도 한 마음 챙기지 못하면 중생이고, 중생도 한 마음을 챙기면 부처라는 것이 불교 평등 사상의 핵심입니다. 일체 중생의 본성을 체와 용으로 잘 신앙하는 사람이 제불 제성의 심인을 나툴 수 있습니다.

/교화훈련부

[2019년 4월26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