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법 종자 쉼없이 심어나가야

[원불교신문=박도광 교무] 한국보다는 조금 늦지만 허허 만주벌판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직도 차가운 한기로 옷섶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날씨지만 겨우내 추위를 이겨낸 이름 모를 새싹들이 땅을 비집고 나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산과 들은 진달래꽃, 살구꽃, 복숭아꽃, 사과배꽃 등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녹음이 우거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자연의 이치따라 이 만주벌판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내가 오매불망 그려보는 일원의 꽃 만발하는 그런 봄은 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지만 아직은 높디높은 현실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중국교화는 부산교화의 효시였던 장적조 선진이 북한지역을 거쳐 북만주로 진출하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원기22년인 1937년에 북만주로 진출한 장적조 선진은 용정, 연길, 안도 길림, 장춘 목단강, 심양, 대련 등지에서 활발히 교화사업을 펼쳐 1945년까지 218명이 입회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 중에서도 목단강지역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어 교당까지 준비됐으나 비상시국으로 인하여 모든 교화사업을 중지하고 귀국하게 됐다. 그렇게 법종자가 만주벌판에 뿌려졌지만 시국의 혼란과 장기적인 이념의 대립으로 인하여 그 뒤로 교화사업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이는 늘 나의 마음속에 진한 아쉬움으로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교화가 다시 시작됐다. 대륙교화란 부푼 꿈을 안고 거점을 확보해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유치원 설립, 식당 민박 운영, 의료봉사, 재해구지원, 불우이웃돕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화사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하지만 중국의 제한적인 종교정책으로 인해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뀌어버린 지금이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다. 

이 때문에 혹자는 '자유롭게 교화하지도 못하는 곳에서 왜 사서 고생하냐'며 '국내에도 교무가 모자라니까 국내로 들어와 교화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중국에서의 현지인 교화는 엄연히 불법이다. 다시 말하면 원불교가 아직 중국에서 정식 허가를 받지 못한 관계로 중국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활동은 불법이 되는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중국교화에는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해 해외교화는 미국교화와는 달리 전 교단적인 관심과도 좀 멀어져 있다는 감도 없지 않다.

현재 중국교화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중국의 투자환경의 악화와 가파른 임금인상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인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동남아지역으로 기업을 이전하고 있다. 

이는 중국내 한국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교당법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현지인 교화제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현지인 교화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교당이 안정적인 재원이 없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중국 물가를 감당하기가 갈수록 벅차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중국교화가 어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교화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 어렵다고 포기하면 나중에는 더 어려워진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인연이 닫는 곳 마다 손길이 미치는 곳 마다 불법의 종자를 쉼없이 심어나가야 한다. 

언제 새싹이 나서 꽃피고 열매 맺는다는 기약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 하나 정성으로 심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의 법 종자가 시절인연을 따라 하나 하나 움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면 그로 인해 원불교가 중국에서 정식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광활한 대륙에도 교화의 봄이 오고야 말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도 대륙교화의 봄이 오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법의 씨앗을 심는 일에 정성을 모은다.

/연변교당

[2019년 4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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