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타원 김성근 종사

우리 삶에 고통과 번민이 왜 없겠는가. 임타원 김성근 종사는 이 모든 고락의 경계를 선과 기도로 풀어갔다.

[원불교신문=안세명] "어디 가서 무슨 수로 삼세 업장을 녹일 수 있겠는가.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세 업장이 녹는다는 말이 있나니 선방에 입선하는 것이 큰 광명을 받는 길이요, 삼세 업장을 녹이는 길이니라." 임타원 김성근(89·稔陀圓 金聖勤, 홍제교당) 종사는 대산종사 법문처럼 일생의 모든 역경을 선과 기도의 힘으로 승화시켰다. 매순간 그에겐 고비 고비마다 스승님의 교법이 있었다.

부모님의 지극한 신심이 유산
그는 전남 영광군 군서면 남중리에서 부친 김은봉 선생과 모친 박향수 여사의 2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전무출신을 많이 배출한 신심 깊은 집안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교무의 길을 걷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어 가계를 이어야 했고,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 속에 출가를 하지 못했음이 그에겐 평생 아쉬움으로 남았다.

김 원로교도는 영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익산으로 전학을 왔다. 마침 조갑종 선진이 그의 외사촌 형부라 익산생활이 시작됐고, 동생 동타원 김의선 교무(유일학림 3기)와 총부에 머물기도 했다. 유일학림 1기생들과는 언니 동생 사이로 막역했기에, 그의 추억 속에 총부는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아련하다.

"총부에서의 가장 큰 기쁨은 어머니를 따라 주기적으로 정산종사를 뵈올 수 있는 것이다. 정산종사께서는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뵙기만 하면 그저 좋았다. 철이 없을 때였지만 저절로 마음에 희열이 올라왔다." 그는 '부처님이란 이런 분이시구나' 마음 깊이 느꼈다. 정산종사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저절로 숙연해졌다. 그 힘으로  일생을 살았다. 어머니의 지극한 신심의 공덕이 그의 삶에 그대로 뿌리 내려졌다.

김 원로교도는 부모님의 교육열에 당시 4년제였던 이리여중을 졸업하고 서울 양재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전문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교사로 갈 수 있기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1학년을 마치니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몸까지 좋지 않아 수학의 기회가 좌절됐다.

그러던 중 23세가 되던 해, 응산 이완철 종사께서 부군인 고 한산 이은석 교무와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익산에 살림을 차렸으나 처음 시작부터 빚을 얻은 간고한 생활고는 평생 김 원로교도의 몫으로 남았다. 그의 어깨는 참으로 무거웠다.

권장부의 삶, 일하고 또 일했다
양재전문학교를 다니며 익혔던 바느질 기술로 익산에 양재학원을 차렸다. 익산경찰서 바로 옆, 일본식 적산가옥 창고를 개조해 교실을 만들고 보화당의 공산 송혜환 원장을 모시고 학원을 운영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교사가 되어 전문반과 초급반을 개설해 바느질 이론과 기술을 가르쳐 양잠점을 차리는 이들도 하나 둘 늘어갔다. 학원을 점차 확장해 중앙시장에 터를 잡게 됐고 2층집도 지었다. 빚은 있었지만 마음은 보람차고 행복했다. "아이들은 친정어머니가 다 키워주셨고, 살림까지 도맡아 하셨으니 나는 오로지 일만 했다. 그 어려운 시기 어머니가 겪으셨을 고충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그에게 어머니는 영원한 스승이자 산부처님이다. 

그러나 전주에 벌였던 두부공장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경제적 고초는 더욱 커졌고, 익산 사업장을 접고 신태인에서 학원을 열게 됐다. 하루하루 전일해야 겨우 생활이 이어졌다. 겨울엔 방에 불이 없어 냉방에서 일했다. 물을 뜨겁게 끓여서 유담뿌에 넣고 이불 속에서 끌어 안고서야 겨우 잠을 잤다. 그러던 중 얼마나 물이 가열됐던지 폭발이 되어 온 몸에 끓는 물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다들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시골이라 번듯한 병원도 없어 연고 하나 바르며 치료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바로 일어나야 했다. 아이들 학업이 걱정돼 쉴 틈이 없었다. 큰아들 장원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마침 신문을 보니 서울에서 우비 만드는 광고를 보고 양재학원에서 공부했던 경험을 용기 삼아 서울로 상경했다. 우비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때마침 부군도 원광사 일로 서울에 주재하게 됐고, 하숙도 하고 공장도 다니며 정신 없이 일했다.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바느질감이 없으면, 스웨터를 짜고 장갑을 만들어 팔았다. 주문량이 많아져 여름에는 목장갑, 겨울에는 가죽장갑을 만들어 머리에 100개씩 이고 배달했다. 목장갑은 어찌나 무겁던지 버스에서 내릴 때면 몸이 휘청했다. 지금도 그 무게를 잊어버릴 수 없다. 때마침 구산 김호영 대호법의 소개로 서울 문화촌 산동네 무허가 집을 싼 가격에 매입하고 장갑공장을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곳곳에 그를 살려주는 인연들이 있었다.

 

이 좋은 회상, 대종사님 한 말씀 한 말씀에 귀의하리라
교당 교무님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교화하고 적공하자

법회에 나가야 했고, 선을 해야 했다
김 원로교도는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평화시장에 아동복 장사를 하니 낮에 일하기 때문에 교당을 못나가 광장시장에서 숙녀복을 팔며 밤장사로 돌렸다. 그는 "법회도 못 나가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영생길을 개척하고 다음 생을 위해 선방에 다니기로 작정했다"며 밤새도록 일하고 오전 9시 일을 마치면 안국동 시민선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일만 하다가 내가 길을 잊어버리겠다"고 정신이 번쩍 난 것이다. 오광익 교무와 이양신 교무 시절 공부에 전념했다. 

고된 장사를 마치고 오전에 정진하는 재미는 보람되고 든든했다. 보은회, 삼삼회도 가입해 보은의 기쁨을 느끼고, 구치소 법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수없이 일을 했지만 언제나 시민선방의 정진이 가장 큰 위안이 됐다. 그렇게 편안한 선 기운이 아침 기도로 이어졌고, 지금도 매일매일 교단과 세상, 자녀들을 위해 공들이고 있다.

그는 "자녀들이 학생회를 스스로 잘 다녔고, 장원·장권은 재가교도로서 교당에서 주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고, 장선·장훈·장은은 전무출신으로서 남에게 구설 안 듣고 사는 것이 참 장하다. 며느리들도 모두가 교단의 일꾼들이다. 말년에 편안하고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됐다"고 행복을 전했다.

대종사님 공부길 삼학공부에 있어
그에게 공부길을 물으니, 잠시도 망설임 없이 "삼학공부다"고 답한다.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 그것이 공부길이다. 경계가 왜 없고, 삶에 고통이 왜 없겠는가. 삼학을 들이대면 해결이 되고 마음이 금방 금방 돌려진다. 그러니 무엇을 오래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는다"며 "그 때 그 때 바로바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훈련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온전히 실행하고, 지낸 뒤에는 바로 잊어버린다. 무슨 건이 있으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화두를 걸어 연구하고, 일이 없으면 잡념을 갖지 않고 편안하게 지낸다.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따라 신중하게 생각해서 처리하면 다 풀린다. 마음가운데 원망하고 막힌 기운이 없으니 언제나 평화롭다 이것이 바로 마음공부다"고 명쾌히 말한다.

"흔히 생사해탈을 말하는데, 나는 그 경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 매 순간 편안하면 된다.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을 한다고 해서 환하게 알아지고 보이지는 않는다. 지혜는 더 밝아지는 것이 분명하다. 일을 당하면 바로 판단이 된다. 일을 지내고 끝내고 봐도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 그의 공부는 마음에 걸림이 없는 온전함에 있다. 종사라고 해서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는 그다.

내생은 전무출신으로 살 것이다
그는 "아무 걱정이 없다. 오늘이라도 죽으면 새 몸 받을 기쁨으로 다시 이 회상을 찾을 것이다"며 "이 생은 사심 없이 잘 살았다. 내생에는 출가서원을 하여 오롯이 다 바치고 싶다. 가정에 얽매이기 보다는 대중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데 그 길은 오직 전무출신이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이 좋은 회상, 대종사님 한 말씀 한 말씀에 귀의했다. 일생을 통해 가장 보람있는 일은 남과 척지는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고, 가정도 이만하고 잘 건사하였기에 오직 공부길에 더 밝아지고 싶을 뿐이다. 

"특별히 스승을 정해 놓고 모시려 말라. 역대 교당 교무님들과 잘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교당에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좋겠다. 교무님들 한 분 한 분 최선을 다해 교화하고 계시니, 참 고맙다. 우리는 바람이 없다." 임타원 김성근 종사의 천어이다.

[2019년 5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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