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자 공부 없이 주의자로부터
자유를 얻는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마침표를 찍으면 도가 아니듯이(道可道非常道), 정답은 없고 명답만 있듯이(無有定法) 스승은 똑같은 질문을 하는 열 명의 제자에게 각각 다른 답을 합니다. 한 제자가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지도인은 오전과 오후의 답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문답은 공부의 방향로를 제시할 뿐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의 삶을 산 경전, 큰 경전으로 삼고 지도인에게 문답하고 감정과 해오를 얻으며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공부인: 일원상의 진리가 대소유무의 이치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병이 된 것 같아요. 사람과 상황을 전체와 부분과 변화로 바라보지 못하고 단정해버리는 사람을 보면 대소유무로 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지도인: 대소유무를 주장하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원래 대소유무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 공부해온 경험이 나타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대소유무의 이치로 보지 못하면 자칫 '대소유무주의자'가 되어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운동권이 될 수 있습니다. "독신은 하되 독신주의자는 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독신주의자가 되면 결혼을 해도 독신을 해도 괴로울 수가 있기 때문이죠.

소태산 대종사께서 '사리연구의 목적'에서 "'대소 유무의 이치'를 모르고 산다면"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치의 대소 유무'를 모르고 산다면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의 원인을 모를 것이며,(중략) 항상 허망하고 요행한 데 떨어져, 결국은 패가 망신의 지경에 이르게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대소 유무의 이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치마다 대소유무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상황마다 이치의 대소유무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전체와 부분과 변화를 잘 살피는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소유무의 이치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대소유무'라는 개념에 집착해서 오히려 생각이 단촉하고 마음이 편협해질 수 있습니다.

유혹에 끌리는 마음이 경계 따라 있어진 묘한 마음 작용이니 유혹에 빠져도 된다고 집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유혹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에 집착해서 방종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겠죠. 그럴 때는 그 사람에게 '유혹에 빠져도 된다'고 집착한 마음을 보게 해서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해줘야 합니다. 

반면,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고 집착해서 남을 비난하고, 자신을 죄인으로 단정 짓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유혹에 끌리는 마음이 원래는 유혹에 끌린다, 끌리지 않는다하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끌리는 묘한 마음의 작용인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유혹에 끌리는 마음 작용을 있는 그대로 공부해서 유혹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해줘야 합니다.

▷공부인: 제가 '대소유무를 왜 모르느냐' 비난하는 '대소유무주의자'였네요. 박노해 시인의 시 '주의자와 위주자'에 "아무리 좋은 주의라도 주의는/ 삶을 하녀 취급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 구절처럼 제가 그 사람의 삶을 보지 못하고 '대소 유무'라는 개념만 주장했네요.

▶지도인: 어딘가에 심취하면 주의자가 되는 것은 극히 정상인데, 다만 주의자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가 아쉽죠. 성공회 신부님께서 마음을 공부하고 난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늘 깨어 있으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고, 늘 깨어 있고 싶지만 깨어있지 않고 그냥 흘려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공부하고 문답감정을 얻고 나니 "깨어있지 못하고 엄벙덤벙 살았구나"하고 느끼는 순간 깨어 있는 것이니 자책하지 않게 되었다고요.

비난하는 에너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마음이 나올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않고 세우고 돌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 이치의 대소유무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마음이 나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자칫 마음을 죽이는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집착한 만큼 해탈을 하는 것이라.

/교화훈련부

[2019년 5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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