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마조 도일과 회양 선사의 '좌선과 벽돌' 이야기는 재미있다. 좌선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은 벽돌을 갈아 거울로 만드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일침을 주는 내용인데,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좌선의 무용함을 드러내는 건 아닐 것이다. 오직 좌선 한 가지만을 닦는 편벽된 수행을 경계한 것이리라.

법정도 좌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좌선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커다란 환희의 법문입니다. 아무 잡념 없이 우리가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이 자체가 커다란 대안락의 법문입니다. (…)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기일회〉 214쪽)

좌선은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가진 통념을 뒤집는다. 잡념 없이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이미 커다란 환희라니! 좌선은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는 훈련 방법이기에, '깨달음'을 목적으로 함도 곧 '한 생각'에 사로잡힌 바라, 이마저 놓으라는 말로 들린다.

좌선은 삼학 중 정신수양을 도모하는 수행의 하나이고, 일없을 때 일심에 전공하는 과목의 하나이다. 〈정전〉 '좌선법'에서 '좌선의 방법'은 단지 9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내용도 매우 간략하게 돼 있다. '휴휴암 좌선문'과 같은 경문을 보아도 그 심오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데, 대종사가 내주신 좌선의 방법은 그에 비하여 너무 밋밋하고 싱겁지 않은가.

그러나 '극히 간단하고 편이함'을 강조한 것은 좌선이 상근기 몇 사람만 할 수 있는 수행이 아니라 '아무라도' 행할 수 있는 수행임을 거듭 알리려 함이다. 또한 좌선을 무슨 대단하고 고준한 수행 방법으로 인식하여, 어려워서 접근하기 힘든 수행이라는 생각의 틀을 깨기 위한 방편이다.

좌선은 말 그대로 앉아서 하는 선이다. 그래서 앉는 것부터 시작한다. 좌복을 펴고 편안히 앉으라고 한다. 그리고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바르게 앉으라고 한다. 이것이 좌선의 방법 1조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편안하고 바르게 앉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라도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기운을 단전에 머물게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눈을 항상 뜨고 입은 항상 다물면 되는 것이다. 잠이 오면 새로운 정신을 차리고, 망상이 나면 정념으로 돌이키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7조와 8조는 특히 '처음으로' 좌선을 하는 사람을 챙기고 있다. 처음으로 좌선을 하면 다리가 아프고 망상이 침노하며 얼굴이 가렵다. 이에 대한 처방도 간단하다. 다리가 아프면 잠깐 바꾸어 놓고, 망념(망상)이 침노하면 그것이 망념인 줄만 알아두며, 얼굴은 긁고 만지지 말라는 것. 

달리 무엇이 더 있는가. 우리도 그렇게 부처님처럼 앉아서 허리와 머리를 곧게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오래 오래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좌선은 쉬운 것이다. 극히 간단하고 편이한 것이다.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음을 소태산 대종사는 분명히 써놓았으며, 결코 '아뢰야식'이니 '함장식'이니 하는, 그런 어려운 소리는 드러내지 않았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5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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