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방룡 교수] 불교와 원불교의 차이 가운데 하나로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시는데, 원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일원상을 모시고 있는 점을 든다. 기존의 불교를 개혁하여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꿈꾸었던 대종사는 그 첫 번째로 불상을 폐지하고, 대신 '일원상'을 봉안했다. 그래서 대종사는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농·공·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됨으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않다"(〈대종경〉 서품 15장)고 말했다. 

소태산은 '불상을 모셔놓고 그것을 부처님으로 섬기는 행위'를 철저히 배격했는데, 이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소태산이 불교를 비판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불교의 긴 역사에서 바라보면 소태산이 불상을 없앤 것은 '불교의 본래정신으로 회귀했다'고 해석해야 한다. 당나라 임제선사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외쳤듯이, 부처는 바로 내 '마음'이지 밖에 따로 존재하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이다.

중국불교가 당 말에 이르면 혜능의 남종선 사상이 천하를 풍미하게 된다. 이는 당시 정치 사회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측천무후의 지원으로 흥성한 불교는 '안록산의 난' 이후 더욱 번성하여 당시 당나라의 사찰의 수가 무려 4만개에 이르고, 승려 수 또한 40만에 이르게 됐다. 결국 당 무종 회창 년간(841-847)에 이르러 국가차원에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뤄졌는데, 이 때 살아남은 불교가 남종선이다.

마조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백장회해가 승려들에게 노동을 통한 자급자족을 하게 함으로써 이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부작 일일불식'이란 유명한 말은 바로 백장의 주장이다. 이후 마조의 제자인 염관제안 밑에 숨어 있던 무종의 삼촌이 황제(선종)로 즉위하면서, '마조-백장-황벽-임제'로 이어지는 임제종이 중국불교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부처는 바로 우리 마음임을 깨달아야

선종이 하나의 독립된 종파로 성립된 것은 백장 때이며, 그 이전의 선종은 율종의 사찰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백장은 당시 수도였던 장안과 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양자강 부근의 오지에 오로지 수행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선수행 공동체인 '백장총림'을 건설하였는데, 이로부터 '선종'은 국가로부터 하나의 종파로 인정받기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때 기존의 불교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던 불전을 폐지하고, 동시에 불상도 모시지 않았다. 백장청규에서 밝히고 있는 선종 가람의 대원칙은 "불전(불상을 모신 전각)을 세우지 않고 오직 법당(수행공간)만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이 백학명선사의 선농일치에 영향을 미쳤고, 소태산의 불법연구회 창립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백장의 수행공동체가 목표했던 것은 '반야지혜를 통한 성불작조(부처와 조사가 되는 것)'였다. 불상을 모시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불상이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눌이 〈수심결〉에서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 법인 줄을 알지 못하여, 법을 구하고자 하되 멀리 성인에게 찾고 부처를 구하고자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관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부처는 바로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결국 마음공부를 통하여 성불제중의 길을 가는 것이 불교의 목표이며, 소태산이 우리를 인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불전에 모셔진 '불상'이 부처가 아니라, 내 안에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마음'이 부처라는 것은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누누이 강조해온 것이다. 소태산은 이러한 불교 본연의 정신을 망각하고 잘못된 길을 걷던 구한말의 불교계를 개혁하여, 불교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고 시대에 맞는 불법을 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소태산은 "이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에게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이 불법의 대의를 연구해서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대종경〉 서품 15장)고 말하고 있다. 

백장은 아예 불상을 모시지 않았고, 소태산은 대중을 위해 방편으로 일원상을 모시게 했다. '같은 점을 크게 생각하고, 다른 점은 작게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선학회 회장·충남대학교

[2019년 5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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