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임병학 교수] 성리품 14장에서는 "대종사 봉래정사에서 문정규에게 물으시기를 '벽에 걸린 저 달마대사의 영상을 능히 걸릴 수 있겠는가' 정규 사뢰기를 '능히 걸리겠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한 번 걸려 보라' 정규 곧 일어나 몸소 걸어가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정규가 걷는 것이니, 어찌 달마의 화상을 걸렸다 하겠는가' 정규 말하기를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갑니다' 하니라"라 했다.

달마대사는 실존적 사람일 뿐만 아니라 진리를 밝히는 존재라 할 때, 진리는 잠시도 나의 마음을 떠나서 있지 않고, 달마대사와 문정규의 본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문정규가 걷는 것이 달마가 걷는 것이 된다.

〈중용〉에서는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도야자 불가수유리·道也者 不可須臾離)"라고 해, 진리와 나는 하나로 실천적 삶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성리품 15장에서는 "선승이 사뢰기를 '도를 듣고자 하나이다. 도의 있는 데를 일러 주옵소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 그대의 묻는 데에 있나니라' 선승이 예배하고 물러 가니라"라 했다.

그러나 대종사께서 '그것은 정규가 걷는 것이니, 어찌 달마의 화상을 걸렸다 하겠는가'라고 해, 아직 제자 문정규가 걷는 것과 달마대사가 걷는 것은 엄연히 구별됨을 지적하고 있다. 대종사는 제자의 행동에 견성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조사서래의)'와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조사동래의)'는 진리가 드러나는 동방의 입장과 진리가 전해지는 서방의 입장이 다르다.

서방은 극락정토이고, 〈주역〉에서는 백성을 상징하는 태방(兌方)이다. 달마가 서방에서 가져온 진리의 소리는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갑니다'로 이어진다. 

이에 동쪽 하늘과 서쪽 하늘, 그리고 기러기를 〈주역〉으로 만나고자 한다.

〈주역〉 2번째 중지곤괘(重地坤卦)에서는 '서남이 벗을 얻는다는 것은 이에 무리와 더불어 행하는 것이고, 동북이 벗을 잃는다는 것은 마침내 경사가 있는 것이다'고 하고, 39번째 수산건괘(水山蹇卦)에서는 '서남이 이롭다는 것은 감에 중도를 얻는 것이고, 동북이 이롭지 않다는 것은 그 진리가 곤궁한 것이고'라고 해, 서남과 동북으로 구분하고 있다.

동쪽은 동북이고 남쪽은 서남으로 보면, 진리를 얻어서 행하는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또 문왕팔괘도에서는 동방 진괘에서 남방 이괘로 진리가 진행되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기러기는 홍(鴻)으로 54번째 풍산점괘(風山漸卦)의 여섯 효에서 모두 논하고 있다. 〈주역〉에서 새는 하늘의 소리를 사람에게 전해주고, 또 사람의 마음을 하늘에 전해주는 천사(天使)의 의미이다. 즉, 달마대사는 법을 전하는 기러기이고, 기러기는 달마가 가져온 진리의 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원광대학교·도안교당

[2019년 5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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