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푸르름이 눈부신 5월,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날 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있었다. 칠순 잔치에 온 딸의 안색을 살피던 아버지는 딸 건강이 걱정돼 보약을 지어 보냈다. 마흔이 다 된 딸에게 여전히 후원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 철없는 딸은 아직도 아버지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하고, 딸이 준 칠순 축하금을 어색해하는 아버지는 여전히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익숙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다 감내하지만, 대가나 보상은 바라지 않는 부모의 마음을 언제 진정 알게 될까.

기자는 아이를 낳아 키워보지 않았기에 그 마음을 짐작만 할 뿐 진정으로 느껴보지 못했다. 주변에 아이를 키우는 이들을 보며, 육아야말로 생활 속 살아있는 진정한 수행이구나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부모가 되어 심법이 달라지는 지인들을 보면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부처가 되겠다고 출가를 했는데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식을 키워가며 자신을 희생하고 자비와 배려를 배워가는 일반인들보다 못할 수도 있겠다는 경각심이 들기 때문이다. 

머리로, 입으로는 법문을 설하지만 마음은 차갑고 오히려 자신밖에 모르는 옹졸한 수행자가 되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스승의 심법은 또 어떠한가. 세상의 모든 관계가 한 형제, 한 집안, 한 권속인 줄 알게 되면 '나'가 없이 오직 천하를 위해 일하려는 마음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100년 전 구인선진은 인류와 세계를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을 보여줬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마음은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교화를 하다 한 번씩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내가 얼마나 공들였는데, 참 섭섭하네' 하는 생각들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잘 주다가도 한계치가 되면 더 이상  주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든다. '나'가 살아있어 대가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나를 온전하게 아이들의 스승일 수 없게 했다. 

성자들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배신하는  사람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못되게 하는 이들을 더 측은지심으로 보듬고 챙겼다. 법인절을 백여 일 앞두고 아사법생(我死法生), 전탈전여(全奪全與)의 마음가짐을 다시금 새겨본다.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돌아보며, 받으려고만 하는 어린 마음에서 벗어나 보은을 다짐한다. 나도 그 누군가의 진정한 부모가 되어, 스승이 되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리라.

[2019년 5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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