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솔성요론의 제1조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제2조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라는 가르침은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각오를 더욱 강하고 새롭게 한다.

내가 진리를 깨치지 않는 한, 성현의 말씀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바닷물의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그 맛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스스로 바다를 찾아가서 직접 맛보지 않는 한 그 맛을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성현의 말씀인 법(=진리적 언어)에 의지해 구도의 길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등산할 때 그 길을 아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와있는 것과 같다. 특히 산행 중 눈·비·바람이 불 때, 노련한 경험의 소유자는 절대적인 존재다. 무명에 싸여 시행착오의 삶을 사는 우리가 성현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성현이 가신 지 오래되어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전해들을 때는 반드시 그 깨달은 내용(법)이 표준이 된다.

나아가 마음을 열고 보면, 사는 세계는 다를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논어〉에는 유명한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세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있다. 한 가지라도 먼저 알게 되면 누구나 스승의 자격이 있다.

겸손한 만큼 스승의 수는 늘게 마련이다. 세계는 광대하여 실제로 우리가 평생 아는 것은 지구 위에 펼쳐진 지식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은 많아진다. 따라서 지자본위의 가르침대로 어떤 분야든 가장 뛰어난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일본에서는 마을에서 분야별로 생활의 지혜가 뛰어난 사람을 명인(名人)으로 부르는 관습이 있다.
최고의 스승은 우주를 주관하는 법신불이다. 다음으로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제불조사다. 현실에서 우리 앞길을 이끄는 스승은 도에 입각하여 원만하며 모두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고통 받는 이웃을 사랑과 은혜와 자비심으로 감싸 안으며, 인류가 확립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비·선악·정사를 구분하되, 파사현정 후에는 그 모두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때로는 빛나는 보석(=진리의 세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여 불토낙원을 건설하며 대중에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처럼 솔성요론1·2조는 우리가 스승의 가치를 알고 믿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는 마음은 허령불매한 성품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엄연히 체용을 주재하는 법신불의 영지(靈知)'(〈정산종사법어〉 예도편 9장)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성품은 법신불의 진리를 구현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태산 대종사께서 "천도에 잘 순응만 하는 것은 보살의 경지요, 천도를 잘 사용하여야 부처의 경지"(〈대종경〉 불지품6장)라고 말씀한 것처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동시에 이웃의 앞길을 여는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다. 마침내 자타 모두 육도윤회를 자유자재하며 복혜가 구족한 영생을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솔성의 길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5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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