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시험기간이 되면 종종 아이들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다. 대학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반 친구 한 명이 충격적인 결심을 이야기했다. 전날 밤 꿈에 하나님이 나오셨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가톨릭 신학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것이다. 친구의 착한 심성과 독실한 신앙을 알고 있었기에 그 꿈을 응원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서울 신학교의 성적은 꽤 높은 편이었고, 그 친구의 성적은 지방에 있는 학교도 겨우 들어갈 정도였기에 나는 걱정 어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생각은 확고했고 수능 직전에 좋은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긍정적이었기에 나도 더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음날이었다. 아침부터 친구가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통학시간을 줄이기 위해 학교 앞에 자취를 시작했다는 것! 그 친구의 집은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했을까. 아무튼 전교 꼴찌나 다름없던 친구가 꿈에서 하나님을 보고서 공부를 하겠다고 학교 정문 앞 자취방을 얻어 산다는 이야기는 특별한 일 없는 고3 수험생들에게 재미있는 놀림거리가 됐다.

그런 시간도 잠시, 오지 않길 바라던 수능시험 날도 결국 찾아오게 됐고 성적표를 들고 학교에 오는 친구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한숨과 절망, 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 친구는 당당한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서 성적표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괄목상대. 전교 등수로만 350등 이상 올랐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골라 들어갈 정도의 성적을 이뤄낸 것이다. 결국 그 친구는 신학대학에 가고 나는 원불교학과를 가며 나중에 성직자로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를 떠올릴 때면 믿음의 힘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한다. 만약 내가 그 친구의 상황처럼 현재 성적과 남은 시간 사이의 긴박한 상황에서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부모님까지 설득해 자취방을 구해달라며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나의 변화를 믿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오늘도 교무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며 햇살처럼 배시시 웃고 말지만, 그래도 나는 온 힘을 다해 역설한다.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라고,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고. 내가 보기엔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친구들이, 먼저 스스로를 포기하고 도전 자체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신(信)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原動力)이니라.' 〈정전〉 대종사는 믿음을 원동력이라고 했다. 수학 시절, 믿음이 마음을 정하는 것이구나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꼭 그게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진짜 큰 신심을 가진 성자들이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보통 사람들도 과연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조금씩 삶을 배워나가며 성자의 한 마디, 한 단어에 그리고 큰 의미가 숨어 있었구나"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오는 요즘이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5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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