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학 교수

[원불교신문=임병학 교수] 성리품 19장에서는 "하루는 학명선사가 글 한 수를 지어 보내기를 '투천산절정(透天山絶頂)이여 귀해수성파(歸海水成波)로다 불각회신로(不覺回身路)하여 석두의작가(石頭倚作家)로다'라 한지라, 대종사 화답하여 보내시기를 '절정천진수(絶頂天眞秀)요 대해천진파(大海天眞波)로다 부각회신로(復覺回身路)하니 고로석두가(高露石頭家)로다' 하시니라"라 했다.

먼저 학명선사와 대종사의 시를 〈주역〉의 입장에서 번역하면, "하늘의 진리를 깨우친 소태산의 절정이여, 바다로 돌아간 물은 파도를 이루로다. 자신이 살아갈 길을 얻지 못하여, 돌 머리에 의지하여 집을 지었도다"이고 "절정은 하늘의 참된 빼어남이고, 위대한 바다에 하늘의 참된 물결이로다. 자신이 살아갈 길을 다시 얻으니, 하늘의 은택이 가득한 돌 머리의 집이로다"이다.

학명선사와 대종사의 시를 대비해보면, 학명선사가 고해(苦海)의 현실에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면, 대종사는 은혜의 위대한 현실을 직시하는 절대긍정의 세계로 답하고 있다.

학명선사의 시에서 산(山)은 '소태산(少太山)'이고, 수(水)는 하늘이 내린 진리로, 대종사는 하늘의 진리를 온전히 깨우친 최고의 경지를 가진 성인이고, 또 바다에 물결이 일렁거리는 것과 같이 역동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반면에 대종사의 시에서는 하늘의 참된 마음인 '천진(天眞)'을 노래하고 있다. 바다의 물결과 산의 절정은 그대로가 은혜인 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절정(絶頂)은 끊을 절(絶)과 꼭대기 정(頂)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꼭대기의 빼어남이다.

또 '불각(不覺)'과 '부각(復覺)'은 일반적으로 '깨우치지 못하다'와 '다시 깨우치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깨우침은 자각(自覺)으로 '자득(自得)'의 의미와 통한다.

즉, 각(覺)과 득(得)은 밖에 있는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미 주어진 본성을 보는 것이다. 각(覺)은 계(彐, 손)와 효(爻, 진리) 그리고 멱(冖, 어둠)과 견(見, 봄)으로,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진리를 양 손으로 헤아려서 아는 것이다.

다음으로 '귀(歸)'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돌 회(回)는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즉, 바다로 상징되는 광대무량한 성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귀(歸)이고, 회(回)는 돌고 돌아가는 삶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뛰어넘을 투(透)와 빼어날 수(秀)도 서로 대응된다. 

또한 대종사의 시에서 '고로(高露)'는 높을 고(高)와 이슬 로(露)로, '높은 이슬'이지만, 〈예기(禮記)〉에서는 "하늘이 고로를 내린다(천강고로, 天降膏露)"라고 해, 기름진 이슬을 밝히고 있다. 고로(膏露)는 세상이 태평하면 하늘이 복되고 길한 징조로 내리는 달콤한 이슬인 감로(甘露)이다. 고(高)와 살찔 고(膏, 기름질 고)는 서로 통한다. 

대종사가 밝힌 일원의 진리는 하늘이 내려준 감로수(甘露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살찌우는 기름진 이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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