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성하 교무] 2년 전 어느날 갑자기 교당에 생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당 내부를 고치느라 한동안 아래층 차고문을 열어뒀는데 아마도 거기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듣기로는 집 안에서 생쥐를 한 마리 목격했다면 이미 몇 마리 이상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있든 없든 눈에 안보이면 그나마 살겠는데 문제는 쥐가 2층 생활관으로 올라와 하숙생들의 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쥐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하신 전임 교무님의 무용담을 들었던지라, 초반에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와 생쥐가 원만히 헤어질 방법을 찾다보니 고양이를 입양하게 됐다. 지금껏 반려 동물을 키워 본적이 없는데다, 심지어 고양이는 살짝 무서워했다.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검은 아기 고양이를 입양하게 됐고, 고양이의 이름은 원불교의 원, 아들 자를 붙여 원자가 됐다. 입양 후 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부엌을 어슬렁거리던 원자씨가 냉장고 뒤편에서 생쥐를 잡아서 놀다가 놓친 후로 쥐들 사이에 소문이 돌은 것인지, 그 다음날로 부터 교당에서 쥐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원자와의 인연이 2년째 이어져 원자 씨는 늠름한 어른 고양이가 됐다. 

얼떨결에 원자를 키우게 되면서 사생중에 사람 외에는 무관하게 살던 내게 동물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려 동물을 키워 본적이 없으니 당연히 동물들과 감정 교류를 한다는 것을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고양이라는 동물과 함께 지내보면서 대종사 말씀처럼 유정물이라는 것은 배우지 않되 근본적으로 알고, 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신령한 것들이고 사생은 어느 것이나 마음 작용을 한다는 너무나 단순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인간의 의식 높아질수록 생명에 대한 각성과 이해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라는 계문 유념해야

대종사가 파란고해의 일체중생을 낙원세계로 인도한다고 했을때, 그 일체중생 속에 내가 고양이라는 것을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생각을 단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육도사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사생 중 오로지 사람 외에 교화의 대상이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사상 가운데서 아상을 떼어야지, 중생상을 놓아야지, 수자상을 버려야지 했으나, 인상에는 별 다른 집착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동물을 키워보니 비로소 속마음을 알게 됐다. 인간이 세상을 독차지하고,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이름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이 세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이 자신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깊이 뿌리 내려 있었다는 것을.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어려서의 편식으로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동물을 기르고 보니, 육식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대종사는 법마상전급 계문으로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라고 했다. 불살생의 계문은 보통급의 계문이지만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라는 계문은 '법과 마를 일일이 분석하고, 경전 해석에 큰 착오가 없으며, 천만 경계중에 사심을 제거하는데 재미를 붙이고'라고 서술되는 어느 정도 신앙·수행을 알아가는 상전급 공부인들의 계문이다. "연고없이"라는 문구의 유연성과 융통성의 범주를 반조하고 점검해 취사할만한 공부인들의 계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교당이나, 재가출가 교도들 사이에서도 이 계문은 거의 무늬만 계문이다. 오히려 현지인 교도들은 대개는 입교를 하면 고지식할 정도로 계율을 엄수하며 보통급에서 당연하게 육식을 멈춘다. 연고라는 것은 아주 엄격하고 드물게 적용이 될 뿐이다. 교당에 드나드는 대개의 선객들이 채식주의자들이며 이들은 명상의 영향력은 생활 전반에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비건이라 불리는, 유제품 조차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들의 인구가 미국에서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교도들에 따르면 실리콘 밸리 쪽에서 채식 관련한 사업이 엄청난 속도로 가파르게 성장 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의식이 높아질수록 인권뿐이 아닌 생명에 대한 각성과 이해 그리고 자비는 저절로 깊어지는 것이다.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라는 이 계문을 괘념치 않는 우리들의 식탁이 안타깝다. 공부와 생활은 어찌 이리 불친인가.

/샌프란시스코교당

[2019년 5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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