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솔성요론 13조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 14조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는 원불교의 정의(正義) 실천론이다. 정의는 법(Dharma), 즉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와 이를 깨달은 성현의 말씀이다. 무념·무상·무착의 청정한 자성이 정의의 근원이다. 그 자성은 이 세계를 무한히 창조하는 일심이다.

또한 눈을 뜨고 보면, 모든 존재는 진리의 화현이다. 즉 법신불 일원상의 내역은 사은이며, 사은의 내역은 우주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대종경〉 2교의품 4장). 따라서 존재 하나하나는 가장 존귀하며,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 공기, 물 등을 포함하는 우주대자연 그 자체가 정의다.

이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논의되는 정의론의 한계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기반으로 하는 공리주의는 소수의 인권과 권익을 배척할 수 있다. 증오와 차별은 집단적 이기심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다수의 이익을 위해 타자의 주체성을 부정할 수 있다. 부처로서의 모든 존재는 우주만큼의 가치가 있다. 따라서 처처불상에 기반한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 모든 존재 각각의 성격에 따른 불공이야말로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다. 대중민주주의도 소외받는 존재가 있다면 완전한 사회적 정의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사회를 한 가족으로 보고, 소수를 존중하며 포용하는 제도야말로 사사불공의 정의인 것이다.

또 하나 인간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가 있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는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배척할 수 있다. 자유의지에 의해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연기적인 관계로 얽혀 살아가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과거 선조들의 영광과 잘못 모두를 짊어지고 타자와의 소통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무와 책임을 통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오랜 동안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터득해 온 결과다.

또한 자유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된 자원으로 개개인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전쟁의 악순환, 자유경제 하의 빈부격차, 지구환경의 악화는 그 증거다. 

이처럼 현대에 회자되는 정의론이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주객(=마음과 현상)을 나누는 분별이성 때문이다. 타자와 공감 및 일치를 이루지 못하며, 내 안의 탐친치 삼독심에 걸려 참된 무아의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정의를 주장하는 인간 자신은 내적 모순과 부조리한 삶의 형태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기주의와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세계보편의 정의론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칠 뿐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는 현대적 정의의 방향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는 일원상의 진리를 체득하고, 세계를 불은화 하는 길, 그것이 바로 죽음마저도 초월하여 지구의 정의를 실현하는 큰 길이다. 정당함과 정의의 앞 글자인 '바를 정(正)자'는 한 번 멈추어서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주 전체와 진리의 근본을 돌아보라는 의미다. 원불교의 존재이유인 사무여한의 현재화가 바로 솔성요론의 정의 실천론인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5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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