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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수첩] 티끌만한 상이라도
[교사수첩] 티끌만한 상이라도
  • 최현진 교사
  • 승인 2019.05.23
  • 호수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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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교사

[원불교신문=최현진 교사] "비에 쫄딱 맞아 옷이 다 젖었어요!" "엥~~ 뭐지?"순간 얼굴에 열이 오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다. 멀쩡한 우산을 가져간 아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지? 가져간 우산은 안돌려주면서, 비를 맞아 쫄딱 옷이 젖었다니... 

짜장, 나를 탓한다. 퇴근길엔 그냥 집에 가면 되는 것을 괜히 오지랖을 피워 우산을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아이에게, 굳이 불러 우산을 쥐어주고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말이다. 비 때문이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이다. 집에 가려는데 기다려도 좀처럼 비가 그치지를 않아 우산을 받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학생 두 명이 작은 우산을 같이 받으니 비에 젖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 내 우산을 그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나는 운전대에 오르며 뿌듯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고 오늘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집에 돌아가 밤에 카톡을 하는 도중에 문득 '아하!' 아이는 사실을 말했는데 내가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했구나. 그 때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을 받아도 어차피 옷이 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 아이가 빗속을 가면서 운동화도 치마도 젖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겠지. 그런데 나는 왜 화가 난 것이지? 나의 여유 없음을 본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면 좋은데 나는 내가 베풀었다는 상에 스스로 갇혀서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있는 나를 본다. "나는 우산을 빌려주는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는 마땅히 감사하다고 해야지 암 그래야지"하며 그렇게 상을 가지고 있었구나. 

성가 78장 '무상의 노래'를 불러본다. '모든 선업 힘을 다해 닦아 놓고도 티끌만한 상이라도 맘에 머물면 한 점 티가 맑은 동자 어지럽히듯 도리어 삼독의 씨 되기 쉬운 것. 경전에 간곡히 이르신 말씀 항하사 모래수의 칠보보시도 상없는 법 닦음만은 못하다시고 마지막에 법마저도 놓으라셨다', 댓가를 바라는 티끌 마음에 머물러 마음의 독으로 퍼지는 나를 발견한다. 상없는 보시이어야 했다, 마지막에 법마저도 놓으라 했는데 여전히 끌리고 있는 나에게서 놓여나자. 

다음날 그 아이를 불렀다. 도망을 가기에 따라가서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왜 그렇게 대답을 했어?" 그 아이 답 왈 "장난 한번 해본 거예요." 그랬지. 그랬어. 어제 우산을 전해주고 싶은 내 마음을 그 아이는 그대로 읽었기에 이미 편안한 관계가 되어서, 서로 장난을 쳐도 될 정도로 마음을 열어 주었었구나. 그런데 나는 틀에 박힌 답에 매어 그 답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바보처럼 화를 냈구나. 그래 다시 그 아이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이 작은 나는 뭐냐? 

내일은 그 아이를 만나 내 마음을 열고, 나도 그 아이에게 장난치면서 손잡고 이팝나무 활짝 핀 교정 숲을 천천히 산책해야지. 함께 걸으면서 마가렛, 범부채, 아이리스, 맥문동도 알려주고, 느티나무 벤치에 앉아 이제 꽃이 지고 열매로 커가는 감나무, 꽃사과 나무도 바라보고 익어가는 버찌도 같이 따 먹어야지.

계절의 여왕 5월, 연두에서 초록으로 가는 이 계절에 그 아이와 걸을 멋진 산책길을 꿈꾸어본다.

/원광정보예술고

[2019년 5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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