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연암 박지원의 여행기인 〈열하일기〉 중에 '일야구도하기'라는 글이 있다. 하룻밤에 중국 황하를 아홉 번이나 건너가는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마침 연암의 마부가 말에 밟히어 뒤에서 수레에 실려 오고 있었다. 연암은 홀로 말을 타고 거센소리를 내며 흐르는 황하를 밤에 아홉 번이나 건너게 되었는데, 그때 문득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즉 마음을 비운 사람은 귀와 눈에 휘둘리지 않지만, 귀와 눈만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자세해져서 오히려 병폐가 된다. 마침내 고삐를 놓고 안장 위에 무릎을 오그리고 발을 모은다. 한 번 떨어지면 곧 물인데,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아 물에 떨어질 각오를 하니 귀에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여 아홉 번이나 건넜지만 근심이 없었다고 한다. 귀와 눈이 받아들이는 소리와 색은 외물이다. 이 외물에 현혹되지 말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라는 의미를 던지는 명문이다. 황하를 아홉 번 건너는 것이 인생의 수많은 경계와 비유되어 있지 않은가.

〈대종경〉 성리품 11장에 나오는 한시 구절에도 아홉 구비가 나온다. 대종사께서 변산 봉래 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써 주신 글인데, '변산구곡로'가 그것이다. '변산의 아홉 구비 구불구불한 길'이다. '구곡'은 주희의 '무이구곡가'로부터 나온 말이기는 하나 변화무쌍한 자연 경관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슴이 아플 때 '구곡간장'이 찢어진다고 하고, 이와 비슷하게 '구절양장'이라는 말도 있다. 아홉은 많다는 것, 다양하다는 것, 그래서 타고 넘어야 할 일이 많은, 매우 굴곡진 삶의 어떤 양태를 가리키는 숫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변산구곡로'는 구불구불한 삶의 여정이다. 수많은 경계와 수많은 유혹과 수많은 욕망과 수많은 시비이해에 휩싸여 흘러가는 인간의 삶 그 자체이다. 그 길을 흐르는 '물소리'가 어찌 요란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석립청수성'이다.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돌이 듣는 그 물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 요란한 물소리를 '돌이'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물의 소리가 돌의 귀를 적실 수 있기나 한가. 그렇다. 물소리가 아무리 요란해도 돌은 태연하게 무심으로 들을 뿐이다. 아예 듣는다, 안 듣는다는 상조차 없다. 어떤 물소리에도 돌은 끄떡하지 않는다. 철주의 중심이 되듯, 석벽의 외면이 되듯.

왜냐하면 없고 없고 또한 없다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아니고 아니고 또한 아닌 것도 아니니 말이다. 없고 또한 아닌데, 없다는 것도 없고 아니라는 것도 아닌데, 달리 무슨 집착이 있으며, 달리 무슨 분별이 있을 것인가. 그것이 성품 자리라는 것이다. 돌이 물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자성을 떠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경계를 만난다는 것이다.

때로 삶이 팍팍하고 수없이 구불구불한 경계에 마음이 힘겹게 오갈 때, 묵묵히 서서 물소리를 듣는 돌의 심경을 떠올린다. 돌이 되자고, 그냥 돌처럼 서서 물소리를 듣자고. 물은 흘러가는 것,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자고. 그럴 때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는 주문이 된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6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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