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원 교화부원장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하라 했다. 원문의 의미를 밝힌다면
'응용하기 전에'란 어떠한 일을 하기 전이며, 응용의 형세를 본다는 것은 기틀을 본다는 뜻이며 변화를 예측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대소유무의 이치로 다시 말하면 유무 변화 자리다. '인과의 이치를 보아'라 해도 좋다. 미리 연마라는 것은 일(事)과 이치(理), 동정(動靜)간에 실행하기 전 연마하라는 것이다. 

일이란 시비이해다. 일의 성공 확률 70%는 미리 연마와 미리 준비에 달려있다. 학생으로 말하면 예습이고, 돈으로 말하면 예축이다. 하루일과나 일정, 사업 등에 대한 미리 연마가 필요하다. 미리 연마와 준비가 부족할 때 정신 육신 물질로 손실이 크다.  

이치란 대소유무라 했다. 이치에서의 미리 연마는 삼학으로 한다. 일의 근간은 이치다. 이치에 대한 미리 연마 중에는 자기수행, 생사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필요하다. 이치에 대한 미리 연마가 부족하면 단촉해지고 편협해진다. 동정간에도 미리 연마가 필요하다. 정할 때의 미리 연마는 수양 연구 훈련과목 등 평상시 어떤 일의 기틀을 준비하거나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다. 

동할 때의 미리 연마는 순간순간 미리 판단이다. 이 안에 응용이 들어 빠른 속도로 처리가 된다. 정할 때에 준비훈련이 없다면 동할 때에 활용할 수 없다. 수양·연구·취사를 따로 공부했지만, 실제는 한 번에 진행된다. 결국 삼학병진의 무시선이다.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하는 공부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생사 준비가 아닐까. 상시훈련으로는 생사해탈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치에 근간해서 일을 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성리(性理)공부이다. 생사와 그 근본은 무엇인가? 이것을 먼저 연마해 봐야 한다. 법문에 '원래 생사가 없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다'고 했다. 다시 대소유무로 설명하면, 대자리는 생사가 없다. 하지만 나타난 소자리에서는 생과 사가 분명하다. 유무자리로 보면 생은 사를 향해 달려가고, 사는 다시 생을 향하고 있다. 이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실지 경계에서는 생사 없는 자리를 먼저 체 받으면서, 동시에 생사 있는 자리까지 활용해야 한다. 

나는 출가이후 지금까지 거의 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병원 응급실을 가보면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상황에서는 죽기 전에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에 인생의 에너지를 쓰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가장 근원적인 것에 에너지를 쓰고 살려고 노력했다. 일원상의 진리 그 자리를 알고, 안 그 자리를 수양을 통해 버티고 지켜서, 실지 경계에 응용해 쓰는 것이 삼학수행이요 마음공부다.

수양을 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비워지면 밝아진다. 스승에게 감정을 받으면서 밝아진 것을 가지고 다시 보림함축의 수양으로 참 마음을 확보해서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견성과 성불의 관계다.  마음의 이치를 아는 것이 견성이고, 수양을 통해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성불이며, 실지 경계를 통해 교화에 활용하는 것이 제중이다. 

 

미리 연마, 시비이해 속에서 
밝고 빠르게 분석하는 힘
경전은 공부의 방향로, 
일과 이치에 눈 뜨여
교당내왕시주의사항 살아나야

노는 시간에 경전법규연습까지 하라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무슨 낙이 있을까 
노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휴식도 없이 공부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노는 시간이란 비생산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쉬는 시간은 휴식을 통한 생산적인 시간이다. 

수험생이 게임하는 것은 노는 시간이고 비생산적인 시간으로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가 휴게소에서 잠깐 쉬는 것은 생산적인 시간으로 에너지가 충전된다. 음양의 이치를 생각해볼 때 잘 쉬는 것도 공부다. 계문에 '잡기를 하지 말며' , 솔성요론에 '주색낭유하지 말라'하신 예로 알 수 있듯 잡기하고, 주색낭유하는 것이 노는 시간이다. 이렇게 노는 시간에 진리를 연마하고 경전법규를 연습을 통해 생산적인 시간으로, 진급의 시간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경전의 연습과 법규는 무엇을 의미하나. 또한 우리 지정교서 외에 불교 학문이나 서양철학 등은 경전에 포함되지 않는가. 교법의 총설에서는 모든 교지를 통합활 용하라 했다
경전이란 우리의 지정교서를 말한다. 이 세상을 둘로 쪼개면 일과 이치이다. 우리의 경전은 일과 이치를 밝혀 마음공부의 방향로를 알려 준다. 우리의 경전 공부를 해 놓으면 일과 이치에 눈이 떠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다른 경전은 쉽게 알수 있고 참고만 해도 된다는 것이다. 

훈타원 양도신 선진이 일본유학을 간다고 하니까 대종사가 그럼 보따리 싸서 나가라고 혼낸 사례가 있다. 우리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리의 체를 잡고 난 후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도한 것이다. 이 뜻을 오해하면 다른 외학을 하지 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선후의 개념이다.

또한 교법의 총설에서 통합 활용의 말씀은, 모든 이치의 근원적인 자리에서 교단 방향을 설명한 것이지 개개인의 수행을 지도한 표현이 아니다. 개인의 수행에 있어서는 선후를 살펴 스승의 지도아래 공부길을 잡아야 한다.

법규란 교헌, 교규, 규율, 규칙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사은 중 법률은과 관계된다. 법규연습은 정기와 상시훈련을 실천하는 것, 30계문을 지키는 것, 원불교의 각종 예법과 신자의 도, 사종의무 등이다. 법규연습에서 연습(練習)이란 연마와는 다른 개념이다. 수천만억번의 반복훈련이 연습이며 실천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상시응용주의사항 4조에 경전법규를 대 강 마친 사람은 의두와 성리 연마하기를 주의하라 했다
'대강 마친다'는 뜻은 어떤 법문의 뜻, 법문의 대의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연습하다 보면 의문이 들게 돼 있다. 상시응용주의사항 3조는 스승의 가르침을 내가 연습해보는 것이지 완전히 내 것이 된 것은 아니다. 4조는 의심을 통해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된다. 의심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든 사람은 여러 경계에서 응용력이 나온다. 의두연마를 통해 그 원리를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현대의 수많은 경계에서 응용력이 약하게 된다. 

의두연마를 하면 혹 망념이 난다고도 하는데, 계속 그 의심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하나의 의심에 도달된다. 욕심을 비워 망념이 없는 가운데 혜광이 솟아나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망념의 의심을 파고들어 그것을 뚫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의두는 〈정전〉의 '의두요목'뿐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경계가 모두 의두가 될 수 있다. 산천초목을 봐도 의심이 걸릴 수 있다. 이 의심을 뚫고 들어갈 때, 감각이 되고 감상이 된다. 이러한 감각감상을 일기로 기재해 스승에게 문답하는 것이 또한 교당내왕시주의사항 1조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음속에 의심과 의두가 없고 지갑에 돈과 카드만 있다면 깨달음이라는 선물은 없을 것이다. 의심이 하나씩 뚫어질 때 그 기쁨을 맛보면 스승에게 보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재 교당 교화문화가 설교중심으로 치 우쳐 있다. 훈련중심의 교당교화로 변화 시키려면 
대종사의 법대로 하면 된다. 자력의 속깊은 수행은 '상시응용주의사항'의 실천이고, 타력을 얻는 길은 '교당내왕시주의사항'이다. 교당내왕시주의사항은 교당의 문답·감정·해오, 훈련과 예회가 이뤄지고 그리고 소득반조를 재가출가가 해야 한다.  

이 질문은  교당내왕시주의사항이 각 교당에서 더욱 활성화 돼야한다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설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문제는 문답·감정·해오의 교당내왕시주의사항, 서로서로 공부할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춘 교화단의 활동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당내왕시주의사항이 교화단이다.

설교도 중요하다. 스승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각인하고 다시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교화단에서 단장·중앙이나, 단원 상호간 종횡의 문답과 감정, 해오의 문화가 잘 이뤄져야한다. 대종사의 〈정전〉에 그 답이 있다.        

[2019년 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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