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것은 나쁘다'는 전제가 불안하게 만드는 것
예민한 나를 보고 웃는 것이 마음의 자유

소태산 대종사께서 가르쳐주신 마음을 사용하는 방법은 각자의 근기와 경우에 따라 각각 그에 맞는 법으로 마음 기틀을 계발하는 공부입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으로 공부하고 일일이 문답하고 지도인에게 감정과 해오를 얻으며, 내 삶을 산 경전과 큰 경전으로 삼는 공부이기에 대종사께서는 우리의 공부가 맞춤복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공부인: 누가 저에게 차갑게 대하면 전전긍긍할 때가 많고, 실수하면 자책하느라 몸까지 아플 지경입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민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더 위축되고 화가 납니다. 제 성격을 바꾸고 싶어요. 활달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훌훌 털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인: 우리는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말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부모, 선생님, 친구, 상사, 직장 동료가 활달한 것은 좋고 예민한 것은 나쁘다고 얘기하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그 말에 맞춰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기질이 모두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마음이 상하는 것이 정상이고요.

자기 자신을 체와 용으로 전체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일원상의 신앙'에 대조해야 합니다. ○○공부인의 체(體)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이 예민하다고 분별해서 괴로운 마음이 나기 전 마음이고, ○○공부인의 용(用)은 예민하다는 말을 듣고서 괴로운 마음이 나는 마음 작용, 진리 작용입니다. 일원상의 신앙은 체와 용을 모두 다 믿는, 전체 신앙입니다.

또한,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와 언어 명상이 완연해지는 것을 모두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언어(言語)는 '말과 문자'를 뜻합니다. 

즉 우리는 '예민하다'라는 말과 문자를 사용합니다. 명상(名相)에서 '명(名)'은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이름이고, '상(相)'은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형상을 뜻합니다.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고 거기에 이름 붙인 것이 '명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민하다'가 돈공한 자리와 '예민하다'가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드러나는 것을 동시에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민함'을 '섬세함'이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예민하다'는 이름을 붙였을 때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와 완연하게 있어지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대조하기 쉽게 풀이하자면 ○○공부인은 원래 '예민한 사람이다, 아니다'하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어느 때는 예민한 기질이 나오기도 하고, 어느 때는 무던한 기질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무던한 사람도 어떤 일에서만은 무척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민함'이 문제가 아니라 '예민한 것은 나쁘다'는 전제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을 공부하는 것은 '예민함을 무던함으로 바꾸는 공부'이기보다는 '예민함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입니다. 경계를 대해서 몸과 마음이 예민해질 때마다 그 예민함으로 공부만 하면 됩니다. 

'묘하게 예민하구나', '○○의 심지는 원래 예민하다, 예민하지 않다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어느 때는 예민하다는 분별이 있어지고, 어느 때는무던하다는 분별이 있어지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죠. 

예민함을 원래는 예민하다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진, 묘한 마음 작용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예민해도, 예민하지 않아도 다 편안합니다. 예민한 나를 보고 웃는 것이 마음의 자유입니다. 내가 예민한 내 모습과 화해하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예민하다고 얘기해도 그런 면이 있다고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원상의 신앙'으로 공부할 때 나도 다른 사람을 쉽게 단정 짓지 않고 전체 신앙할 수 있습니다.

/교화훈련부

[2019년 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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