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수신의 요법은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삼학수행을 말한다. 전통적인 계정혜 삼학의 근본과도 일치하며, 동양의 정신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특히 제1조,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라고 한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확충하고, 인류 진화에 따른 지혜를 갖추어 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이다. 개인이 쌓아올린 삼학의 힘이 시대와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사회적 삼학으로 승화되어야 진정한 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학문은 공자가 설하듯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니라 위인지학(爲人之學)이 됐다. 즉 자신의 수행을 위한 학문보다는 남을 의식하는 학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가 도덕적 완성을 위한 학문이라면, 후자는 거래와 이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그렇게 많은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지구는 점점 회복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위기에 대처하기보다는 개인과 집단적 욕망에 학문이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학문이 학문답기 위해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자신의 수양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데에까지 이르러야 참된 학문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목표는 법신불의 덕을 천하에 밝히는 것에 있다. 나아가 수신의 최종 목표는 일원상 진리와의 합일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 방식을 제시한 것이 수신의 요법이다. 핵심은 전인적 인간완성을 위한 삼학이다. 학문을 먼저 제시한 것은 도학과 과학의 병진, 나아가 일치시키기 위한 배려다. 삼학에도 지혜를 연마하는 혜학이나 사리연구가 있지만, 이 지혜를 발휘하여 과학과 정신문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삼학으로 개인의 성불에 이르러야 하지만, 모두 함께 부처가 되는 일승(一乘)정신을 실천해가야 한다.

동서양 문명이 함께 어우러진 현대의 문제점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고려하지 않으며, 천지자연과는 분리된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존재라고 보는 오만함에 있다. 지구 위기의 근원은 인간이며, 문제 해결의 열쇠도 인간이 쥐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전환해야 한다. 즉 자신만을 위한 소아·소욕을 이웃과 인류와 지구 대자연 모두를 위한 대아·대욕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배우며 몸에 익히는 지행합일의 경지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의 도심이 무한대로 확충되고, 나의 도력이 널리 미칠 때 비로소 바른 수신의 길이 된다. 

삼학을 끊임없이 닦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품고 있는 불성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다.  〈대학〉에서 사람이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을 이룬 후, 제가, 치국, 평천하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수신 이전에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불성의 모습이다. 이 불성이 바로 수신하는 주인공이다.   〈중용〉에서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천지의 지극정성한 도인 동시에 불성의 본 바탕이다.

불성은 이처럼 나의 생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문명의 위기도 수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정의의 역사는 세계변혁의 밑바탕에 반드시 나의 변화가 선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9년 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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