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산 이백철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은생어해(恩生於害). 기구한 삶이 아니었다면 역겁난우를 뚫지 못했을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고, 가족은 빚보증에 모든 것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 친견한 소태산 대종사.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어린 시절 대종사께 들었던 꾸지람과 칭찬을 잊지 못한다는 법산 이백철(92·法山 李百徹) 원로교무. 그가 평생 일관했던 강직한 신성과 공심, 공부심은 어릴적 뵈었던 소태산 대종사와의 언약에서 비롯됐다.

빚보증으로 흩어진 가족
그가 태어난 전북 무주군 적상면은 당시 산중이었다. 불법연구회는커녕 세상 돌아가는 소식 알기도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논밭이 있어 가족은 굶주리지 않고 살만했었다. 할아버지가 빚보증을 서기 전까지. "우리 할아버지가 마음씨가 좋아서 친구가 보증 서달라고 하니까 서줬는데 그게 잘못돼버렸어. 있던 논밭 다 팔고 집까지 팔아 빚갚고 나니까 살길이 없어져 떠돌아다니게 됐지."

아버지는 돈 벌기 위해 이북 탄광 모집에 자원하고는 자식들이 잠든 사이 집을 나가버렸다. 할아버지는 달걸이(만덕산 옛지명)에 아는 인연이 있어 그곳으로 먼저 자리 잡고 며느리와 손주들을 오게 했다. 그럼에도 살길이 막막하자 어머니는 그를 나중에 데려갈 요량으로 남겨놓고 다른 형제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고아가 되어버린 그를 책임져야 했던 할아버지도 밥한끼 먹기 어려운 현실에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손주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음을 알고 알음알이로 총부로 보내게 된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가 학업의 꿈을 안고 총부에 왔던 때는 13살이었다. 그런데 공부는커녕 처음 만난 아주머니는 밥을 하라고 쌀을 내줬다. 양하운 대사모였다. 당시 밥을 하려면 조리질을 하면서 돌을 걸려내야 했다. "내가 밥을 언제 해봤어야지. 그리고 밥은 여자가 하고 남자가 하는게 아니여. 그런 인식이 내가 꼬마였을 때 꽉 들어있었지."

당시 양하운 대사모 집은 현재 영빈관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 샘이 있었는데 총부에 사는 여성들이 쌀을 씻으러 오는데 꼬마가 조리질한다며 그가 올때마다 구경하러 모이곤 했다. 그러던 5월 어느날 그는 처음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게 된다.

"우연히 총부 조실쪽을 바라보고 싶었어. 그런데 묘하게 조실쪽 서푼짜리 판자에 구멍이 나있었어. 구멍을 딱 보니까 날은 맑은데 대종사께서 까만 법복을 입고 까만 양산을 들으셨어. 팔월 보름달이여. 세상에 저런 어른이 있나 싶었지. 얼마나 광채가 나시던지 입이 벌어져. 그때 처음 뵌거야."

대종사는 구타원 이공주 선진댁(현재 청하원)에 들렸다가 영빈관 자리인 사가에 왔다. 당시 둘째아들이었던 광령(光靈)이 병들어 학교도 못가고 집에서 양하운 대사모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대종사는 그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그를 보게 된다. "대종사께서 영광 사투리로 대사모에게 '저 자식 어떤 자식이냐'고 물으셔. 그런다음 오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어. 내가 그런 복 받았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부처 되자는 게 아닌가.

 

나는 재가가 됐든, 출가가 됐든
일과에 정성들이자고 말해.

 

전생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 시절부터 지금까지
 좌선을 꼭  2시간씩 해왔어.

 

나는 여래가 최고 목표야.
조급하게 생각안해.
하지만 여래가 기어이 될 것이네."

조리질은 부끄러워서
그러던 어느날 아낙네들처럼 조리질 하는게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그는 대사모에게 "내가 부끄러워서 밥은 못하겠으니까 복숭아밭 똥지게 멜께라우"했다가 대번에 쫓겨났다. 어쩔수 없이 다시 만덕산으로 돌아간 그를 본 할아버지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한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이번에 그를 미륵사로 보냈다. 미륵사에 간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절만 올리게 했다.

"아마도 절을 시키지 않았으면 내가 중이 됐을 것이여. 총부는 밥하기 싫어서 나왔는데, 미륵사는 절하기 싫어서 나왔네." 그는 별수없이 14살 되던 해 총부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는 총부에서 불때는 일, 식당에 땔감 준비해 놓고 따뜻한 물 끊이는 일 등을 맡았다.

세계를 경영하시는 어른
"당시 총부 구내에는 샘이 7~8곳이 있었는데 대종사께서 화재나면 불 끌것까지 생각하시고 샘을 파 놓으셨어. 그리고 총부 식당 앞 우물은 5월달만 되면 다 퍼내서 청소를 시켰는데 위생 때문에 그러셨지.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신지 몰라."

여러 곳에 위치한 우물과 샘 중에서도 가장 더러웠던 곳이 총부 식당에 위치한 우물이었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식당에서 쓰는 식수로 많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위생적 관리는 필수였다. 그래서 적어도 이곳 우물을 청소할 때면 물을 모두 퍼낸 다음, 당시 몸짓이 가장 작았던 그가 우물 밑으로 줄타고 내려가 전부 씻어내는 작업을 펼친 것이다.

"대종사께서 다른데는 몰라도 그 샘은 꼭 보시더라고.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는가 안되었는가. 이것을 보고 나는 세계를 경영하시는 어른이시구나 하고 느꼈어."

상산 박장식 종사의 칭찬
"나같이 성공한 사람이 없대. 그때 꼬마가 이렇게 된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상산 박장식 종사가 칭찬해 주셨어. 그 광경을 다 봤으니까."

원기26년 출가이후 용신·아영·당리·화해·운봉교당에 근무했고, 익산보화원, 재무부 차장, 원광사 사장, 서울보화당, 서울수도원, 교화부 순교감, 영모원장, 수계농원장, 중앙수양원장을 역임하고 원기77년 정년퇴임한다. 그 가운데 남한강 사건 수습, 서울보화당 건물건, 전무출신 용금제 도입, 영모묘원 이전, 영산 제2방언 공사, 중앙수양원 부지 확보, 성주성지 구도지 성역화 등 교단의 숱한 어려움을 묵묵히 감내해가며 보은의 길을 매진했다.

나는 정성의 사나이
"우리가 부처되자는 거 아녀. 그런데 부처되는 일을 해야 부처가 되지. 다들 말로는 여래가 다 됐어. 실지로 들어가면 그러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재가가 됐든 출가가 됐든 일과에 정성을 들이라고 말해. 일과에 정성 안들이고 부처된다는 것은 거짓말이니까."

우리 공부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일과에 있다고 강조하는 그는 특히 아침 좌선을 강조했다. "내가 전생 습관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 꼬맹이 시절에 좌선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누가 가르쳐준 사람도 없는데도 그 시절에 좌선을 꼭 2시간씩 했어. 지금 생각이 나는 것은 주산 송도성 선생이 태산교악처럼 앉아 계시던 모습이야."

아흔이 넘어서도 소태산 대종사 재세 시절의 총부 정진 문화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도 매일 새벽마다 2시간씩 선을 지켜나가고 있다. "나는 정성의 사나이야. 여래의 사나이. 나는 여래가 기어이 될 것이여. 조급하게 생각안해. 나는 여래가 최고 목표여."

노구에도 불구하고 이소성대의 원리로 반드시 여래를 이루겠다는 그의 일성에는 어릴 적 소태산과 약조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사무치는 신의가 느껴졌다.

[2019년 6월2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