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창현] 북한의 종교탄압을 거론하거나 종교단체의 성격을 평가하기에 앞서 북한의 역사나 주민들의 정서를 깊이 들여다보며 '왜 종교가 북한에서 설 땅을 잃었나'를 우선 고민해 봐야 한다. '북한에도 종교가 있나'라는 질문 대신 '왜 종교가 쇠퇴했나'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을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종교 자유 탄압하는 '특별우려국' 북한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고 종교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을까? 형식적으로 보면 그렇다. 북한도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를 규정해 놓았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하나 붙어 있다. 종교로써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이 조항에 따라 외국 종교인들이 종교시설 밖에서 종교의식을 갖거나 선교활동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 된다. '사회 질서 침해'도 너무 포괄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북한에는 사실상 서구식 개념의 '종교 자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1998년 제정된 국제종교자유법에 따라 세계 각국의 종교자유를 평가하는 미국 국무부는 2001년 이후 중국과 함께 북한을 매년 '종교자유 특별우려국'으로 지정하고 있다. 물론 북한에도 여러 종교단체와 시설이 존재한다. 현재 북한에는 각 종교별로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조선정교위원회 등 5개 종교단체와 이 단체들의 협의체인 조선종교인협의회가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6.25전쟁 이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들 종교단체들은 1950년대 중반 이후 공식 무대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조불련은 1965년~1971년 사이, 조선그리스도연맹은 1964~1973년 사이, 조선천도교회는 1949~1973년 사이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72년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고, 주체사상이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로 확립된 후에 다시 공식 활동을 시작한다. 

1972년 12월27일 북한은 기존 헌법을 사회주의헌법으로 개정하면서 "모든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동시에 명시해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헌법 규정 마련과 주체사상의 확립 이후 북한은 기존의 종교단체들을 북한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다시 조직했다. 

이에 따라 1972년 9월 조불련이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뒤를 이어 1974년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조선기독교연맹(1999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개칭)이, 1988년 6월 조선천주교인협회(1999년 조선카톨릭협회로 개칭)가 뒤를 이었다. 

종교단체들의 재등장은 북한 내부적으로 주체사상의 틀 안에서 성격과 역할이 재조정됐고, 외부적으로 국제사회와의 종교교류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북한을 찾는 종교인사가 늘면서 이들이 평양에서 예배를 보거나 예불을 드릴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해졌다.

2012년 11월 평양 장충성단을 방문한 박창일 신부의 집도로 북측 천주교신도와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미사를 보고 있다.(사진제공 박창일 신부)

5개의 중앙 종교단체가 활동
가장 많은 사찰과 신도수를 보유한 조선불교도연맹 산하에는 전국 10개 도당 조직과 50개 시·군별 조직이 설치돼 있고, 교육기관으로 평양 광법사에 불교학원이 개설돼 있다. 형식적으로 전국신도회도 있다. 6.25전쟁 전 북한지역에는 약 500만 명 정도의 불교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불련 설립 초기에는 신도수는 27만명으로 발표됐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본부는 평양 봉수교회 건물 옆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은 중앙조직으로 총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있으며, 지방조직으로는 도(직할시) 연맹, 시, 군(구역)연맹, 가정예배소 등이 있다. 신도수는 1만여 명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평양신학원도 개설돼 있다. 

조선카톨릭협회의 활동 거점은 평양의 장충성당이다. 산하에는 교구가 아닌 평양지구, 동해지구, 서해지구 등 3개 지구로 나눠져 있다. 그중 신자가 1500여 명 되는 서해지구가 역사적으로 가장 뿌리가 깊다. 각 지구마다 가정 예배처소가 있으며, 지구에 속한 신자들을 위해 남포와 원산에 공소를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도 다른 종교단체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고, 2000년대에 들어와 그리스정교회계통의 정백사원이 건축되면서 조선정교위원회도 설립됐다. 북한식으로 '토착화 된 종교기구'라고 평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의 종교단체들은 "북한이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결성한 대외선전용 종교기구"로 평가된다. 실제로 이들 종교단체들은 "정부의 정당정책을 높이 받들고 나라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세계의 공고한 평화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을 기본 사명"으로 한다.

그 동안의 활동자체도 남북 종교교류나 국제교류에 치중돼 있다. 순수한 종교단체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치단체의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다. 이들 단체를 이끌어 가는 수장들인 강지영 카톨릭협회 회장 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강수린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의 고위간부를 역임하거나 겸직하고 있고, 강명철 조선그리스도연맹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고위직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2007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평양 광법사에서 남과 북의 스님들이 함께 등을 달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미디어한국학)

북한주민 정서 고려한 선교 전략 필요
그러나 북한의 종교탄압을 거론하거나 종교단체의 성격을 평가하기에 앞서 북한의 역사나 주민들의 정서를 깊이 들여다보며 '왜 종교가 북한에서 설 땅을 잃었나'를 우선 고민해 봐야 한다. '북한에도 종교가 있나'라는 질문 대신 '왜 종교가 쇠퇴했나'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 선교를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6.25전쟁 이전에 북한지역에는 3천개 이상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5백여 개의 사찰이 있었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 성당, 사찰이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일부 산악지역에 있던 사찰만이 전화(戰火)를 비껴갔을 뿐이다. 일부 주민들은 '기독교 국가' 미국을 믿고 교회나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태평양전쟁 때보다도 더 많이 쏟아진 폭격에는 예외가 없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미군의 폭격은 '공포와 분노' 그 자체였다. 더구나 1946년 토지개혁이 단행되면서 북한지역의 모든 사찰은 국유화되었다. 종교활동이 유지되거나 확산될 수 있는 뿌리 자체가 완전히 뽑힌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정서와 감정은 바깥에서 생각 이상으로 호의적이지 않다. 평양에서 만나 대화해본 북한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형성돼 있다. 

현재 북한의 50~60대 장년층은 전쟁 이후세대로 종교를 접해 본 경험이 없고,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종교가 일종의 아편, 미신으로 간주하며 투쟁과 척결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세대교체가 되면서 사회주의 이념이나 주체사상이 확립된 후 태어나 자란 20~30대들은 아예 종교에 관심이 없다. 외부의 선교활동이나 음성적인 '지하교회'에 대해서는 체제 전복세력이나 불순세력으로 본다. 

봉수교회에는 6명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예배 때마다 '우리 주님께', '감사하신 예수께서' 등의 찬송가를 부르지만 모두 60대 이상이다. 젊은 세대의 후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역사와 정서를 고려하지 않거나 북한 체제 붕괴만을 기도하는 대북 선교정책은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역사와 주민 정서를 감안하면 그나마 종교단체가 존재해 교류를 추진하고, 전국적으로 60여 개의 사찰과 평양의 봉수교회, 칠골교회, 장충성당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이다. 

북한이 남북 종교교류, 국제교류에 적극성을 띠면서 해외와 남한의 종교인들 주도로 교회, 병원, 학교, 양로원 등 건축물이 들어서고 종교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게 그나마 북한에 다시 종교의 씨앗을 뿌리고 선교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약력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현재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2019년 6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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