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대종사 말이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보시고 한 제자에게 물으시기를 "저 수레가 가는 것이 말이 가는 것이냐 수레가 가는 것이냐" 그가 사뢰기를 "말이 가매 수레가 따라서 가나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혹 가다가 가지 아니할 때에는 말을 채찍질하여야 하겠느냐, 수레를 채찍질하여야 하겠느냐." (〈대종경〉 인도품 8장)

남악선사가 마조에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하느냐 소를 쳐야하느냐'하고 선문답을 했던 내용을 대종사가 인용하여 제자에게 근본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법문이다. 소가 수레를 끌고 있으니 당연히 소를 쳐야한다는 우문이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여정에서 과연 '수레가 아니라 소를 치고 있는가'하는 물음에 다다르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되고 만다.

나도 대종사를 따라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꼭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은 소를 잘 이끌고 있습니까?" 개인적인 소견으로 보면, 소는 근원적인 면이고 수레는 표면적인 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는 수레에 짐을 싣고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목적에만 집착하여 수레에 많은 짐을 싣고 좀 더 잘 굴러가는 수레를 개발하기 바쁜 듯하다.

특히 자본주의와 즉각성이 부각 되는 현대의 모습 속에서 이런 면은 더욱 부각 된다. 만약 일정량의 돈을 이 수레에 투자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수레에 투자한다면 눈에 보일 정도로 수레는 좋아져 있을 것이다. 안정성 있는 바퀴와 마찰력이 최소화된 베어링, 혹은 구동장치를 통해 알아서 잘 굴러가게 개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을 소에 투자한다면 어떨까. 그 일정량의 돈만큼 좋은 먹이를 주고 양육환경을 만들어준다면 그 소는 금세 좋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혹은 그 두 배에 달하는 돈을 투자한다면 두 배 더 상태가 좋아질 수 있을까. 역시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보다 수레에 투자하고 만다.

아이들의 교육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예전에 강남 대치동에 살던 시절, 수많은 학원 속에 둘러싸여 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당시 대학생이었기에 별로 체감하지 못했지만, 동생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조금 귀를 기울여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한 달에 수백을 들여 교육에 투자하고 아이들이 학원을 전전하며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과연 그 아이들의 수레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과 부모님들은 수레에 학원과 과외를 담고, 야간자율학습을 담기에 바쁜 모습은 보였지만, 정착 근원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안 자고 그 많은 학원을 전전하면 뭐하나, 정작 앉아있는 당사자는 곪아 있는 것을.

내가 보고 상담했던 아이들은 하나 같이 똑같이 묻는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유명한 공부법이나 학원, 학습플래너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건 '넌 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위로와 마음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하고 이야기해본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6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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