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학생들과 수업을 하기 전에는 늘 명상을 함께 한다. 처음 명상을 하며 가만히 행동과 생각을 멈춰보라고 하면 그 어색한 침묵이 웃긴지, 누군가 한 명이 웃고 그 웃는 소리에 따라 웃고 그 상황을 보며 또 웃다 보면 교실은 곧 웃음바다가 되어버리고 만다. 매년, 모든 교실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 웃을까 싶은 궁금증도 생긴다.

몇 해간 지켜보니, 요즘 아이들은 침묵을 어색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만히 있는 시간을 스마트폰이 모두 차지했고,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다 보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너무 이상한 것이다.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군대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이었다. 사격에 대해서 조교가 이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 과정을 다 마치고 질문을 받았다. 그때 나는 의욕이 넘치는 이등병이었기에 왜 사격 거리가 250m까지 밖에 없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조교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범위가 250m 전후이기 때문에 사정거리를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교육을 받던 훈련병들은 조교의 막힘없는 이론에 갈채를 보냈고, 왠지 기분이 좋아진 듯한 조교는 웃으며 퀴즈를 하나 냈다. 또한, 맞춘 사람에게는 꿀과 같은 휴식을 제공한다는 말에 훈련병들의 눈빛은 오아시스를 찾은 조난자의 눈처럼 빛났다.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이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때가 언제인 줄 아느냐?' 여기저기서 추측이 난무했다. 오전, 정오, 오후를 비롯하여 습도가 낮을 때 높을 때, 기온이 낮을 때 높을 때 등등의 온갖 조건들이 나왔지만, 정답을 말해줘야 할 조교의 입은 요지부동이었다. 한참의 답변들이 모두 쏟아진 후, 조교는 아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때는 한밤중이다.' 거기 있던 모두는 의아하다는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한밤중에 가장 멀리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어지는 조교의 말은 가관이었다. '수만 광년 너머의 별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조교의 유머에 저걸 어떻게 맞추냐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리게 되었고, 결국 휴식은 물 건너갔다며 투덜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큰 감상을 얻었다.

우리는 지식을 쌓고 많이 배우고 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다 보면 외부의 지식에 파묻혀 정작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상의 불빛이 꺼져야 만 년 전에 빛나던 하늘의 빛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 듯이, 우리의 마음이 바쁘고 할 일에 치일 때 잠시 그 마음을 멈추고 내면을 관조하면 알게 모르게 지혜의 샘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선(禪)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 바, 예로부터 큰 도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선을 닦지 아니한 일이 없나니라. (〈정전〉 무시선법)

온갖 지식과 현란한 미디어 매체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로 앞의 화려함이 아니라 내면의 고요함 속에 숨어있는 선의 지혜를 아이들이 깨닫길 염원하며, 오늘도 아이들과 웃음을 참아본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6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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