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립 국악단원 이미화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는가?/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송강 정철 '성산별곡' 중에서)

옛 선비들이 거문고를 좋아했던 이유가 우직한 저음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모든 인위적인 것을 거부한 순수한 음색 때문이었을까.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바로 눈앞에서 연주되는 '수리재'를 들으며 질문은 달아나고 인터뷰하러 왔는지 연주회에 왔는지 다 잊어버렸다. 명주실 여섯 줄이 뱉어내는 깊은 울림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연주로 모든 이야기는 끝났는데 굳이 짧은 문장력으로 전하려니 아쉬운 마음이 절절하다.

거문고 연주가 이미화(법명 성제·강북교당)씨를 만나기 위해 경북 고령에 있는 대가야국악당을 찾았다. 경상북도 도립 국악단이 2년 전에 고령 대가야국악당에 둥지를 트는 바람에 국악단원인 그도 대구를 떠나 고령으로 이사했다. 그는 경북 국악단원이 된 지 20년 6개월, 지난 6월30일자로 정년퇴직을 맞았다. 

"만 40세에 입단했어요. 이렇게 늦게 들어온 예가 전무후무합니다. 대부분의 예술이 그러하듯 주로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시작하고 대학 졸업하면서 입단하거든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했고 대학 전공도 서양음악 작곡이다. 대구경북 원음합창단 피아노 반주로 6년여 합력한 전력도 이 때문이다. 우연히 국악애호가 단체인 '한소리회'에 가입했다가 거문고의 매력에 빠져 10년 동안 취미로 배웠다. 취미로는 성에 안차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 레슨을 받았고 이후 아예 전공을 바꿔버렸다. 36세에 거문고가 있는 곳을 찾아 영남대 국악과에 학사편입해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조교로 근무하던 중 경북 국악단 채용에 응시해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단하게 됐다. 

"음악이 만국 공통어라는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은 전혀 달라 매우 힘들었어요. 백지 상태의 어린 아이들은 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미 서양 음악의 물이 20년 넘게 들어있어 배울수록 의문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혼란 속에 자리잡은 음악이 어느 경지에 오르고 보니 오히려 강점이 됐다. 국악도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곡들이 창작되니 곡을 해석하는 폭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 3월 대구경북교구장 취임식 때 축하공연으로 연주한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 4월 강북교당 대각개교절 기념 공연 때 연주한 '수리재'도 모두 창작곡이다. 선비들이 주로 하던 정악이 큰 변화 없이 단조로운 연주를 하는 경우가 많아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비교적 최근에 창작된 연주곡들은 훨씬 더 익숙하고 풍부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거문고는 가야금만큼 애호가가 많지는 않지만 마니아층이 깊어요. 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배에서 나오는 힘으로 울리는 소리가 거문고 소리입니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듯 말짱하게 악보만으로 하는 연주는 아무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어요.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할 때 나오는 소리라야 합니다."

대중가수들이 히트곡을 200번은 불러야 자신 있다고 하듯이 그는 능숙한 작품이라도 무대에 설 때는 항상 2,3백 번을 넘게 연습한다. 

"독경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잠시라도 끼어들면 찰나에 어긋나 버립니다. 하다보면 내 음악에 내가 취해 삼매에 빠집니다. 음악도 마음공부와 똑같이 하고 또 하는 일심공부입니다."

거문고(검은, 북)는 어느 날 고구려의 왕산악이 멋지게 연주하자 어디선가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2줄의 가야금은 손가락으로 튕겨서 높은 소리를 내는 반면, 6줄의 거문고는 술대(대나무 막대기)로 치거나 뜯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처음엔 힘이 많이 들어가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어요. 오십견, 손목, 허리 디스크 등 육체노동에 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박이는 건 당연해 몸을 많이 혹사시켰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또 그러고 있겠지요 뭐."

그동안 연륜이 쌓이다보니 사랑하는 후진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는 늘 솔성요론을 가슴에 담아두고 산다. '다른 사람의 원 없는 데에는 무슨 일이든지 권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할 것이요'

그런 그가 퇴직하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음악 디자이너. 문화센터나 교당 등에서 기왕에 가지고 있는 음악적 재능을 살려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음악으로 풀어내며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싶다. 수 십 년 동안 법회나 천도재 등에서 성가 반주로 봉공해오면서 풍류로 낙원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게 돼서다.

"다음 생에는 지혜가 좀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들이대도 툭툭 터지는 사람이 됐으면 싶어 매주 마음공부방을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2019년 7월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