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지도인은 넓게는 스승, 교사, 선지식, 구루(Guru)를 말하며, 나아가 과거·현재·미래의 제불제성이 그 표본이다. 성현은 자신을 완성한 사람을 말한다. 즉 진리(천리)의 세계를 마음속에 확립한 분이다. 이분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지행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앎이 행동과 직결되어 있다. '안다'는 의미는 실천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을 관통하는 통일된 인식과 실천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앎을 지혜라고도 한다.

성현의 또 다른 특징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공자가 스스로 "옛 것을 좋아하므로 열심히 노력하여 구한 자"라고 칭한 것처럼, 현재의 성현들은 앞선 성현의 자취를 본받아 현실에 필요한 지혜로 변모시킨다. 이 분들은 동시대인들의 갈증을 꿰뚫고 오히려 지혜를 부어줬으며, 진실을 은폐하고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사술(邪術)에 대해 단호한 파사현정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그 공덕은 무한한 신뢰와 영구적인 이익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학문은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라는 반성이 필요하다. 옛날부터 성현들은 지식을 통해 인심(人心) 속에서 욕심을 제거하고 천심이나 도심을 함양하는 마음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지식이 오직 권력과 명예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과 공동체의 의로운 길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떨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많은 지식은 이 사회의 도덕성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또 하나는 지도인의 지식은 과연 자신의 마음속 깊은 성찰에 의해 얻어진 것인가, 라는 점이다. 주자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통해 스스로 체험한 도덕성과 이에 걸맞는 실천을 병행하고자 했으며, 왕양명은 치양지(致良知)를 통해 이미 마음속에 갊아 있는 실천적인 도덕의 본체를 삶속에서 확립하고자 했다. 이것이 소위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의 마음공부다. 다소 방법은 달라도 결국 일원상의 진리와 같은 마음을 회복하여 안으로는 성현을 이루고 밖으로는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이유는, 진리적 삶을 위해 '과연 나는 진정 무엇을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먼저 깨우치는 반성이 앞서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성현들은 이 점에서 자신의 내면을 향해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힘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도인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처럼 자기성찰로부터 시작된 진리와의 소통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도인이 갖추어야 할 지식은 이탈리아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듯이, 진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지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지성은 법신불 일원상에 대한 수행적 직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이며, 불변인 동시에 인간 누구나 실천해야 할 지혜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지식을 소유한 자로 보지 않고, 진리로부터 얻은 지혜를 구사하여 이 사회와 세계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왜 지성인으로서의 지도인의 덕목을 중시했을까. 지식사회로 변모해가는 현대문명의 앞길을 생각했을 때 그 깊은 의미가 더욱 새로워진다.

/원광대학교

[2019년 7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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