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열 경남교구장

[원불교신문=이경열 교무]

업이란 무엇일까
천도품 28장에 9인 제자 중 한 분인 팔산 김광선 선진이 열반하매 대종사 눈물을 흘리시며, 대중에게 말씀하십니다. "팔산으로 말하면 이십여 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하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정이 들었는지라 법신은 비록 생멸이 없다 하나 색신은 이제 또 다시 그 얼굴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어찌 섭섭하지 아니하리요" 하시면서 팔산의 영을 위하여 업보 멸도에 대한 법을 설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천도품 28장에 근거하여 다생에 지은 업보를 소멸하고 선업을 지으시기를 기원하며 '업을 만났을 때'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업(業)이란 무엇일까요? 업이란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에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지요. 행위가 인과관계와 결합되면서 선악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의 과보가 생긴다는 것으로 선업(좋은 일)을 행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악업(나쁜 일)을 행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업은 몸으로 짓는 신업과 입으로 짓는 구업과 마음으로 짓는 의업의 3업이 있지요. 나아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대로 반드시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전생에서 현생으로 그리고 내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면 천종만종이지만 2가지 형태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현생에 전생의 지은 바대로 끌려 사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현생에 전생의 영향은 받지만 그 업을 알아차리고 소멸시키고 선업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도 있지요. 

우리는 때로 전생에 지은 업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요즘 무슨 업을 받고 있습니까? 자녀가 업일 수도 있고 배우자가 업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가 업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성격과 환경과 병고와 외모와 지혜 등이 업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업을 짓고 있습니다. 

원불교 불법을 만나 우리는 불법의 가르침으로 새로운 선업을 짓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입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지은 업에 끌려가기도 하고 알아차리고 수용하기도 하고 청산하기도 하고 새롭게 선업을 짓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업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1.끌려갈까요? 2.'내 업이구나' 하고 알아차릴까요? 3.자성의 혜광을 따라 업을 소멸할까요? 4.업을 은혜로 반전시킬까요?  

업을 만났을때 1단계
보통의 경우 업을 만났을 때 1단계, '끌려갑니다.' 천도품 11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컨대 담배를 하루에 2갑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어제 담배를 피웠을까요? 내일 담배를 피울까요? 분명 어제도 담배를 피웠고 내일도 거의 담배를 피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업의 원리를 알면 우리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업의 원리는 지으면 지은대로 받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요.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과보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원리를 이제 알았으니 우리는 작은 일부터 변신을 해야 합니다. 그 변신하는 법을 지금부터 안내하겠습니다. 

업을 만났을 때 2단계
'업을 알아차리고 갚을 자리에 쉬어봅시다.' 이미 지은 업이기에 멈추고 "앗! 내 업이구나." 하고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알아차리고 수용할 때, 내 업이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이미 지은 업은 그 어떤 누구도 면할 수 없는 것이지요. 경하게는 할 수 있어도 면할 수는 없지요. 업의 원리가 지은 대로 받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지요. 내 운명은 내가 지은 바요 내 책임이기에 부모도 자녀도 스승도 원망할 수가 없지요. 내가 지은 바이기에 갚을 자리에 일단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앗! 내 업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업을 멈추는 것이지요.

보왕삼매론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보통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서 마음이 몹시 안 좋고, 억울한 일을 풀려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하는 것이기에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는다는 것은 그냥 그 업을 멈추고 갚을 자리에 쉬어 버리는 수행이라 연마됩니다.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자신에게 다가서는 모든 업은 다 삼세인과의 업의 원리 따라 그 때 그 시간에 자신에게 다가와 노크하며 업의 결과를 제시하겠지요. 그러니 업의 결과가 경계로 다가설 때, 일단 멈추고 "내 업이구나" 하고 업을 알아차리고 수용하며 갚을 자리에 쉬어야 합니다. 
 

수많은 인연과 경계와 업들은 
자신을 사람 만드는 도구이며 
업을 소멸시키는 절호의 기회이자
악업을 선업으로 반전시키는 찬스

 

어떤 업을 만나더라도 
감사와 은혜로 반응하게 될 때 
분명 새로운 선업으로 변화될 것

업을 만났을 때 3단계
'자성의 혜광을 따라 업보를 소멸합시다.' 아하! 업은 원래 없건마는… 시절인연 따라 업이 있어졌구나. 원래 없는 자성의 혜광을 따라 업이 사라지겠지요. 새벽에 태양이 뜨면 어둠이 점점 사라지듯이 업은 원래 무명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무명이란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요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지요. 

어느 날, 지인과 우연히 모 선배교무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모 선배교무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앞 뒤 상황을 정확하게 모른 체, 강한 어조로 몰아치며 이야기 했던 아주 기분 좋지 않은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이게 뭐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만에 그 모 선배교무님에 대한 이야기 중에 그 때 무척 불쾌했던 감정이 또 다시 올라옴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업이구나.' 몇 년 전에 내가 마음으로 지었던 업이 몇 년이 지났지만 모 선배교무님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똑같은 불쾌감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깨어있었지요. 아하! 불쾌한 감정인 먹구름이 일어나는구나. 

이 먹구름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 망념이 침노하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아두면 망념이 스스로 없어질 뿐. 잠시 멈추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입가엔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불쾌감도 없는 소소영령한 자성이 드러났지요. 

그렇습니다. 업의 원리에 따라 과거에 지은 바대로 불쾌감이 일어났다가 알아차리고 깨어있으니 그 불쾌감은 스스로 사라지고 공적영지의 광명이 드러나 스스로 영지가 빛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공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 안에 공적영지의 자성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일이요 적공하는 일입니다. 각자 안에 공적영지의 빛이 밝게 빛나고 있다면 우리는 업에 끌려가지 않고 업에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업을 만나게 될 때, 원래 업도 없는 자성의 혜광을 밝히게 될 때 자연히 모든 업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업을 만났을 때 4단계
'업을 은혜로 반응합시다.' 90대 10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는 스티븐 코비가 인생을 바꾸는 원칙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코비가 말하는 '90대  10의 원칙'은? 우리 인생의 10%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로 결정되며, 나머지 인생의 90%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10%는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90%는 다릅니다. 우리 각자는 그 남은 90%를 결정합니다. 어떻게? 각자의 반응에 따라서 90%가 결정됩니다. 각자 자신의 반응 선택권은 자신에 달려있습니다. 각자 업의 결정은 자신이 하지요. 

저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비난과 충고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합니다. 저의 업도 지금 이순간 자신의 반응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앞에 다가서는 수많은 인연과 경계와 업들은 자신을 사람 만드는 도구들이며 업을 소멸시키는 절호의 기회이며 악업을 선업으로 반전시키는 멋진 찬스이니 어떤 업을 만나더라도 감사와 은혜로 반응하게 될 때 분명 새로운 선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교도님들! 순간순간 업을 만날 때 마다 '내 업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갚을 자리에 쉬어 봅시다. 자성의 혜광을 따라 업보를 소멸합시다. 업을 은혜로 반전시킵시다. 그래서 세세생생 행복하시기를. 세세생생 평화롭기를.세세생생 지혜롭기를 축원합니다. 

[2019년 7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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