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세상살이 모두가 고통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처음으로 선언한 분은 석존이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무상하다. 모든 존재는 실체 없는 '흐름'이다.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이불완전한 세계에 집착함으로써 고통이 발생한다.

석존은 인간의 구성요소를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이라고 보았다. 이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그대로 보고 아는 것, 즉 무상과 무아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과 해탈이다. 마침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상락아정(常樂我淨), 즉 생주이멸이 없는 영원성,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난 극락의 평온함, 망아를 벗어난 진아·대아의 경지,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함을 맛보게 된다.

고와 낙은 인과법칙을 잘 알고 활용하는 것에 달려있다. 우연히 받는 고는 원인을 알지 못하고 받는 고를 말한다. 사실 자연계는 현생에서 과거의 업을 잊게 한다. 그것을 다 기억한다면 머리는 복잡해진다. 그러나 반드시 돌아온다. 받는 차례대로 현생은 순현업(順現業), 다음 생은 순생업(順生業), 그 이후는 순후업(順後業)이라고 한다. 언제 받을지 알 수 없는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또 다른 측면은 공업(共業)이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해를 동반하는 자연변동은 그것의 결과다. 예측 불가능한 이러한 사태를 만든 것은 우리 인류다.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지구는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경고하게 될 것이다. 더 넓게 보면, 우주적 차원의 업의 흐름도 있다. 우주가 진·강급기에 놓여 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한다.

윤회가 반복되는 세상과 이를 벗어난 열반과 해탈의 세계는 마음에 달렸다. 이 세상은 하나의 세계뿐이다. 한 마음이 지옥이면, 이 세상 또한 지옥이다. 한 마음이 천국이면, 이 세상 또한 천국이다. 마음의 초점을 어느 지점에 맞추느냐에 달려 있다. 같은 세상이지만 마음의 각도 여하에 따라 지옥과 극락을 결정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무지와 습관이다.

불성은 무명을 밝음으로 인도하는 우리 안의 부처다. 그 부처가 있어 세상살이의 중심을 잡는다. 고와 낙은 이 중심으로부터 가깝고 멀고의 차이에 있다. 중심으로 돌아오는 힘은 바라보는 것에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그 바라보는 자(자신을 인식하는 주체)를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 돌리는 힘은 자신을 바라보는 회광반조하는 힘이며, 나의 운명을 객관화 하는 힘이다. 밖을 향한 빛을 돌이켜 안을 비출 수 있다면, 걸음걸음이 삼계(三界)를 벗어나게 된다. 자신의 관성(습관)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자는 우주 전체와 소통하는 바로 자신의 주인공이다. 구습을 과감히 타파할 때, 인과를 흔쾌히 수용하는 동시에 극복할 수 있다. 그때 해탈과 동시에 지복이 찾아온다.

나아가 상시응용주의사항에서 '온전한 생각의 취사'는 일상 속에서 인과를 결정짓는 공부다. 대산종사는 '멈추고, 생각하며, 취사하는 공부'는 '일심 정력, 바른 지각, 취사의 결단력'을 얻는 천여래 만보살을 낳는 공부법이라고 설한다. (〈대산종사법어〉 제2교리편 65장). 

결국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의 진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무념·무상·무착의 진공묘유의 수행이야말로 영원한 낙을 누리는 대도라고 할 수 있다.

/원광대학교

[2019년 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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