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실시품 7장에서 입교한 창부들의 교당 출입을 반대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도의 문은 도리어 그러한 죄고 중생을 위하여 열리었나니…. 어찌 다른 사람의 치소를 꺼리어 우리의 본분을 저버리겠는가.' 불성에 차별이 없는데 함께 배우기를 꺼려한다면 그 사람이 도리어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나무란다. 지금도 이런 경우에 흔연히 창부를 받아들일 교당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지당한 경전 말씀이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창부만이 아니다. 괭이를 든 농부, 마치를 든 공장(工匠), 주판을 든 점원, 정사를 잡은 관리들도 선(禪)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처소도 구분하지 않았다. 소태산의 무시선법(無時禪法)은 산중 승려의 전유물이었던 선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선의 혁명이었다. 상시응용주의사항 5조를 보더라도 수양의 주인공이 유별난 구도자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림'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석반 후 살림에 대한 일이 있으면 다 마치고 잠자기 전 남은 시간이나 또는 새벽에 정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이라고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교법 전반에는 출가 중심의 불교에 대한 강한 혁신 의지가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요즈음 교단을 보면 교법의 지향과는 달리 다분히 출가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전무출신의 헌신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정책과 운영이 편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반성은 재가교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알게 모르게 교도라는 테두리를 치고 비교도에게 견고한 진입장벽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전무출신과 재가교도는 두말 할 나위 없이 교단의 뿌리이자 주인이다. 하지만 교화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넓은 범위의 대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가 요청된다. 응용의 형세를 따라 교화의 방식도 과감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아직 교도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 '낯선 시선'으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전년대비 2.9% 오른 8,590원의 최저임금에 애면글면하는 노동자와 고용자, 꿈을 꾸지 않는 청소년, 결혼을 포기한 젊은이, 종교를 시대의 유물로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원불교를 다시 보아야 한다. 나아가 해양쓰레기에 고통 받는 바다거북, 온난화로 사냥터를 잃은 북극곰, 멸종위기에 처한 제주도 구상나무의 시선으로 원불교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원불교의 존재 이유는 파란고해에 고통 받는 중생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들의 낯선 시선과 눈을 맞추어야 하고, 우리 마음이 그들의 마음에 닿아야 한다. 교화와 교단의 변화는 더 넓은 곳의 낯선 시선들을 응시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의 시선과 마음도 거기에 함께 할 것이다.

[2019년 7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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