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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세상 위해 산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위해 사는 것"
[선진의법향] "세상 위해 산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위해 사는 것"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9.07.17
  • 호수 1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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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 조원오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큰 바위 얼굴을 사랑한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어니스트. 그는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고 이를 진실로 믿으며 겸손히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친다. 짧지만 울림이 컸던 <큰 바위 얼굴> 단편소설 내용이다. 그런데 큰 바위 얼굴을 사랑했던 소년이 여기 또 있다. 갖은 고통 속에서도 화평했던 정산종사의 용안을 보고 한순간에 매료돼 평생 닮아가기로 했던 소년의 이야기. 바로 월산 조원오(72·月山 趙圓悟) 원로교무의 이야기다.

맹모삼천지교
그의 출생지는 전북 익산시 신동이다. 영광 군남이 고향이었던 부친 진산 조진영(본명 선학)이 전무출신의 뜻을 품고 익산에 왔으나 할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좌절되자 그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모친 도타원 강청진을 만나 슬하에 5남매를 두게 된다.

"당시 우리집이 삼성교당이 있는 곳이었어. 중학교 2학년까지 살다가 익산교당 근처로 이사를 왔지." 교당 근처로 이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에는 한국전쟁 이후로 사회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으면 도박이 유행해 이로인해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부모는 혹여나 자녀들에게 안좋은 습관이 생길까 염려해 그가 중학교 2학년때 중앙총부 옆 익산교당 근처로 이사한 것이다.

"익산교당 학생회에 정말 열심히 다녔지. 하교하면 집에 들리지 않았어. 바로 교당에 갔지. 교무님께서 청소 시키면 하고. 거기서 사는게 낙이었지." 그러다보니 그 역시 전무출신을 선택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실증이었다.

큰 바위 얼굴을 사랑한 소년
그러나 그가 출가를 선택한 데에는 더욱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정산종사와 만남이었다. 당시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익산교당 학생회는 총부 대각전을 빌려 법회를 보았기에 그에게 대각전은 친근한 장소였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에 열리는 총부 법회까지 참석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종법사였던 정산종사가 일요 법회에 임석하게 되는데 그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당시 열반하기 1년 전이었던 정산종사는 중풍이 심해지고 있었다. 구조실에서 지프를 타고 대각전 입구까지 와서 시자들의 부축을 받아 대각전으로 입장했기에 어린 그의 눈에도 정산종사의 몸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정산종사를 뵈면서 어린 나이에도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어쩌면 저렇게 편안하고 용안이 맑을 수 있을까'하고 황홀경에 빠져버렸지. 나도 저런 어른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 동경의 대상이 됐지." 그는 대각전 뒷자리 구석에 앉아 정산종사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법회가 끝나면 재빨리 일어나 정산종사가 나오시기를 기다리다가 가실때까지 서 있었다. 누가 시킨일도 아닌데 매주 이 일을 거르지 않았다.

"정산종사를 뵈면서 저런 어른을 닮고 싶다는 꿈을 키운 것 같아. '아. 그러면 전무출신을 해야되겠구나'하고 말이야."
 

"퇴임하고 돌아보니까 그때 만났던 인연들 
그 당시 주어졌던 일들 모시고 살았던 어른들께 
좀 더 최선을 다할걸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어. 
후진들은 이렇게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당부하고 싶어."

무게 자체가 다른 똥통
그의 바람처럼 큰 스승을 닮고 싶다는 마음은 교단내 큰 스승들을 모시게 되는 인연을 닿게 만들었다. 다섯명이 들어가면 한두명만 남는다는 수계농원에서 간사 생활을 시작할 때 승산 양제승 종사와 장산 황직평 종사의 만남이 그랬다.

집에서 농사일을 해본 사람도 버티기 힘들었던 수계농원 일이 농사 초보였던 그에게는 험난 그 자체였다.

"장산님은 익산교당 학생회때 교무셨는데 수계농원 가보니 여기에 계시는거야. 힘들고 못살겠다고 하면 감싸주실 줄 알았는데 '이놈 바로 가라'고. 다른 사람들은 혼을 안내는데 유독 나만 혼을 내시더라고. 나도 화나서 '갈란다'고 했지. 그런데 막상 가려고 보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 강하게 키우기는 승산종사도 마찬가지였다.

"수계농원에서 처음해보는 일이 많잖아. 내가 '처음 해본다', '안해봤다' 그러면 승산종사께서 '안 해봤으니까 해봐야지'하면서 봐주는 게 없었거든."

어느날이었다. 승산종사는 그에게 똥통을 짊어지라고 했다. 물통은 짊어봤어도 똥통은 처음이었던 그였지만 어쩔 수 없이 매야 하는 분위기였다. 똥통은 무게 자체가 달랐다. 개울을 건너야 할 때 그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오물을 온몸에 뒤집어 썼다.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러고는 신심이 나더라고. 오기도 나고.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냐고 하면서 말이야."

기자는 좋은 글을 써야
그는 원불교신문사와 인연이 깊었다. 원기 58년 첫 부임지로 발령받고, 원기79년은 사장으로 발령받는다. "원불교신문사는 내가 교무로서 군대다녀온 후 첫 직장이야. 격주간 발행부터 열흘에 한번내는 순간(旬刊)까지 근무를 했지. 신문사에 관심과 애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지."

그가 첫 부임지로 발령받았을 때는 신문사가 초창기와 마찬가지였다. 당시 주필로 효산 조정근 교무, 편집국장에는 담산 이성은 교무, 그리고 나문정 교무와 함께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신문을 만들어냈다.

이후 원기79년 사장으로 발령받을 때는 신문사가 어느정도 체계를 잡을 때였다. 그는 그동안 발행된 신문들의 전산화 작업을 처음 착수했다. 교구단위 통신원 제도를 재가 청년들을 활용해 시작했다.

"기자는 좋은 기사를 써야돼. 글쓴다는 것이 무서운 일인지 늘 알아야 하지. 그만큼 자기가 쓴 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서 어려운 일이지. 어렵고도 힘든 일이니까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지 안그러면 지치고 힘들어져."

말은 지금 이순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글은 한번 쓰면 고칠 수 없이 오래간다. 특히 원불교신문은 안으로는 교단의 역사가 되고, 밖으로는 교단의 얼굴이 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라는 그의 당부였다.

후회없는 삶을 살기를
후진들을 위해 보감삼을 덕담을 부탁드리자 <신심명> 한귀절이 이어졌다. "승찬대사가 쓴 <신심명>에 보면 귀근득지(歸根得旨)라는 글이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깨달음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교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알고보면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야. 그러기 때문에 내가 왜 이일을 하는지, 내가 왜 전무출신을 하는지 근본을 잃지 말고 해야 돼."

근본에 대한 당부는 계속됐다. "그 다음에 수조실종(隨照失宗)이라는 말이 나와. 수조(隨照)는 밝게 비치는 외경에 따른다는 소리야. 좋은 자리, 명예로운 자리, 권리, 이욕 그런 곳을 쫓다보면 실종(失宗)하고 말아."

그가 평생 살아오면서 깨달은 간절함은 한마디로 허투루 살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당부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러 어른들께 '지금 자리가 꽃자리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는 귀에 안들어왔어. 그런데 지금 퇴임하고 돌아보니까 '그때 만났던 인연들, 그 당시 주어졌던 일들, 모시고 살았던 어른들께 좀더 최선을 다할걸'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어. 그래서 후진들은 이렇게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당부하고 싶어."

[2019년 7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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