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북한 당국은 북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종교를 권장하지는 않지만 외부인들이 종교시설에 가서 종교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허용하고 있다. 북한의 종교시설은 설립 계기와 활동을 통해 볼 때 대외교류와 선전 목적이 강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교적 기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일 예배를 보실 분이 있으시면 아침 9시까지 호텔 1층으로 나오십시오." 남쪽이나 해외인사의 방북기간 중 일요일이 끼게 되면 전날 북측의 안내원은 교회나 성당에 갈 방문객이 있는지 확인한다. 통상 개신교 신자들은 봉수교회에, 천주교 신자들은 장충성당에 가서 예배를 본다. 불교 신자들은 주로 광법사에 가서 예불을 올린다. 방북 러시아인들 중 정교회 신자들은 정백사원에 간다. 

2007년 신축한 봉수교회 전경.

수교회와 칠골교회
북한 당국은 북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종교를 권장하지 않지만 외부인들이 종교시설에 가서 종교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허용하고 있다. 1988년 10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설립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남북교류와 국제적 접촉을 시도하면서 종교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에 거주하던 김성락 목사와 홍동근 목사의 역할이 컸다. 김 목사는 1981년과 1982년 평양을 두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났다. 이때 김 주석이 김 목사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했고, 기도가 끝나자 김 주석이 "아멘"으로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만남 이후 재미교포 목사들의 북한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1981년 처음 평양을 방문한 홍 목사는 방북할 때마다 "평양에 교회 하나 짓자"고 줄기차게 권유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인민들의 반감과 불신 때문에 아직 공개적인 교회건축이 여의치 못하다"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북한은 내부적으로 천주교인협회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신자찾기운동'을 전개해 800명 정도의 신자를 찾았다. 

1987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내에 종교학과를 설치해 종교교류에 대비해 인력 양성에 나섰고, 1990년에 홍 목사를 초청해 신학특강을 맡기기도 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목사도 1992년과 1994년에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특강을 했다. 재미목사들의 김일성 주석 만남, 1989년 남쪽의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 북한 '종교 부활'의 계기가 된 셈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8년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건립될 수 있었다. 1988년  10월 완공돼 11월6일 첫 예배를 드리면서 공식적으로 문을 연 봉수교회는 약 2천여 평의 부지에 450석 예배당을 갖췄다. 부지는 북한당국이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건축비는 형식적으로 북한 교인들의 '헌금'과 해외 기독교 단체에서 보낸 지원금으로 충당됐다.

봉수교회는 2008년 남북 합작으로 재건축돼 그랜드피아노를 비롯해 40석의 성가대석과 대형 스크린을 갖춘 현대식 교회로 변모됐다. 신자는 300여 명으로, 평소에는  100여 명의 신자가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들은 남쪽의 성서와 거의 비슷한, 자체적으로 번역한 성서를 낭독하고, 가사만 조금씩 다른 찬송가를 부른다. 

봉수교회 외에 평양에는 1992년 신축된 칠골교회가 하나 더 있다. 칠골교회는 원래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이 시무 장로로 재직한 교회이고, 어머니인 강반석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다녔던 곳이며, 김일성 주석 자신도 어렸을 때 이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이 교회 건립을 위해 1989년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가 1만 달러를 헌금했고, 1994년 1월 그레이엄 목사가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설교한 바 있다. 북한에서는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주한 주민들 중 가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이 교회당 건립을 요청했고, 김일성 주석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곳에 교회당 건립을 허락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2006년에 동평양 낙랑구역에 세워진 러시아정교회 교회당 정백사원.

 

북한 유일의 가톨릭 성당인 장충성당
북한 유일의 가톨릭 성당인 장충성당은 동평양지역에 있고, 1988년 9월에 완공돼 10월 로마 교황의 특사 일행이 방문해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고 첫 미사를 열었다. 250석 규모의 회중석에 제단과 제의실, 성가대석, 고해소와 각종 성화 및 성물 등을 갖추고 있다. 신부와 수녀는 없고, 주일마다 신도들이 성당에 모여 회장과 부회장 2명의 주관 하에 기도회를 진행한다. 신자 수는 3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남쪽과 해외에서 방문하는 동포들을 비롯해 평양시에 거주하는 외교단 구성원들과 외국인 기술자, 유학생들도 주일 미사와 대축일 미사에 참가한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한국교회와 기성 종교들로부터 줄곧 이단종교로 비판받아온 통일교(2013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개칭)의 공식교회당인 '평양 가정연합교회'가 있다. 이 예배당은 통일교가 보통강변에 지은 '평양세계평화센터' 빌딩 안에 있다. 통일교는 1991년 문선명 총재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것을 계기로 북한과 여러 분야에서 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황해남도 안악군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三聖祠). 조선시대 환인·환웅·환검의 삼신을 모신 조선시대 사당이며 단군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일제가 허문 것을 2000년 북한이 복원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문화유산에서 종교시설로 
북한에는 현재 60여 개의 사찰이 남아 있다. 북한에서는 사찰이 여전히 종교시설이란 측면보다는 문화유산(문화재)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사찰의 책임자도 '주지'보다는 '관리인'으로 불렸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스님들은 여전히 장삼을 걸치고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관리인'으로서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평양 광법사를 방문했을 때 "머리를 깎지 않으셨는데 북의 스님들은 다 대처승입니까?"라고 묻자 "우리는 대처승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남쪽 태고종도 삭발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머리 깎고 안 깎고는 자유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남북 불교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북한 사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한의 스님들도 머리를 짧게 깎고, 장삼을 입고, 독경을 하기 시작했다. 외부인사의 방문이 허용되거나 관광지로 개방된 사찰의 경우 이제 대부분 남쪽과 비슷한 스님이 배치됐다. 

평양의 광법사·용화사·정릉사·법운암, 개성의 안화사·영통사·관음사, 황해북도 정방산의 성불사, 금강산의 신계사·표훈사, 묘향산의 보현사 등이 외부에 공개된 대표적 사찰들이다. 다만 북한의 불교신자들은 정기적인 예불보다는 남북 불교 공동행사나 부처님오신날 행사 등 제한된 행사 때만 참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천도교와 대종교에서 '성지'로 중시하는 삼성사(三聖祠)가 황해남도 구월산에 있다. 삼성사는 고조선 시기부터 단군에 대한 제를 지내고 고려 말기부터 단군과 함께 환인, 환웅의 제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1916년 대종교 창시자 나철 대종사가 이곳에서 숨을 거둔 뒤 일제가 허문 것을 2000년 북한이 복원했다. 북한에서 한 때 번성했던 천도교의 경우 52개의 교당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공개된 적은 없다. 

가장 최근에 들어선 종교시설로는 러시아정교회의 정백사원이 있다. 2001년 북러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음 해 '조선정교위원회'가 설립됐고, 2006년에 동평양 낙랑구역에 정백사원이 완공됐다. 북한의 종교시설은 설립 계기와 활동 등을 통해 볼 때 대외교류와 선전 목적이 강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교적 기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ㆍ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ㆍ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ㆍ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ㆍ(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ㆍ현재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ㆍ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ㆍ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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