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학교에서 아이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특히 아이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참 유치하게도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별 것 아닌 일로 싸우고 다신 안 볼 것처럼 이야기하며, 실제로 여자 학생들의 경우에는 졸업할 때까지 보지 않기도 한다.

같이 뜻이 맞아 동아리를 하고 함께 공부하다가도 뭐 하나 틀어지면 엄청나게 싸운다. 싸우는 과정은 매우 치밀하고 눈치도 많이 보며 인간관계도 신경을 쓰는 등 전략적인 면모가 많지만, 정작 싸우게 된 원인은 진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다. 보통은 친구에 대한 험담을 뒤에서 하다가 걸리거나, 과제를 같이 하다가 도망가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이유가 졸업할 때까지 절교하게 되는 원인이라니 이건 비극을 넘어 희극에 가까운 상황이 아닐까 싶다.

이런 아이들의 다툼을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이 싸우지 않는 이상적인 상황이란 만들 수 없다는 점이었다. 교무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나 그룹 활동을 하면서 우리 애들은 안 싸우도록 잘 지도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능숙하게 가르치고 지도하면 싸우지 않겠지 싶어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다툼은 일어났다.

왜 다툼은 계속 생길까.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인가, 깨달은 성자라면 어떤 방편을 써서 아이들이 화기롭게 지낼 수 있게 만들 것인가 열심히 의두를 들어봤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만약 대종사가 지도 교사라면 아이들이 싸우지 않았을까하는 의문까지 들었을 때,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대종경〉 속에도 제자들은 서로 싸우더라는 사실을.

성자도 다툼을 안 생기게 할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는 성자들은 다툼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 주의를 기울이자 조금 해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싸운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싸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승려들이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걸 보고 토론을 시작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있으니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한쪽은 깃발이 있으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인연의 원인과 수용체에 대한 꽤 고차원적인 철학 논쟁이 이뤄지고 있는 그때 혜능이 나서 일갈했다. "너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이들의 다툼은 시비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시비를 나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배움이고 교육이라면 나는 그 속에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이들은 보통 자신이 상처받은 것을 통해 남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꾹꾹 눌러 담고 살다가 상처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제공한다. 아이들의 다툼 속에서 그 마음속 상처를 발견하면서 내 마음속의 상처를 관찰한다. 우린 서로 아픈 사람들이었구나 싶은 생각에 말을 건넨다. 

"우리 같이 마음 공부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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