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삶은 한 편의 음악이자 미술이며 영화와 같은 예술이다. 어떤 예술품도 삶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개개인은 스스로 삶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그 작품은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자신만의 절대적 세계에 속한다. 그 각본의 두 구성 요소는 영과 육이다. 삶은 영육의 씨줄과 날줄이 엮어내는 위대한 교향악이다. 마치 잘 정비된 비행기를 운항에 능통한 기장이 멋진 비행으로 다음 행선지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우주가 출현한 이래 진리는 삶을, 삶은 진리를 떠나지 않았다. 즉 일원상의 진리는 우리의 영육을 창조하고, 돌보며, 그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 영과 육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영육쌍전법'에서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 산 종교라야 할 것"이라고 설하듯이, 종교의 핵심은 이 둘의 조화로써 고해의 삶을 불토낙지로 이끄는 것이다. 즉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룬 심신일여의 삶, 나아가 진리와 합일하여 매순간 동정일여의 창조적인 삶을 이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들은 일찍이 이 점에 눈을 떴다. 선(禪)이 중국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영육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점을 경험으로 인식한 것이다. 4조 도신선사의 수일불이(守一不移, 하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 것)를 통한 일행삼매, 5조 홍인선사의 수본신심(守本眞心, 본래의 참마음을 지키는 것)에 의한 일상불사(日常佛事, 삶 전체가 불법을 드러내는 일), 6조 혜능선사의 "불법이 세간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 깨침은 없다. 세간을 떠나서 깨침을 찾는 것은 토끼에게서 뿔을 구함과 같다"고 한 것은 실제로 낮에는 농사를 지으며, 밤에는 수행에 매진했던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정신에서 나왔다. 마침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는 백장선사의 유명한 법문이 나오게 됐다.

무시선은 이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즉 공적영지에 기반한 진공묘유의 삶, 자성을 떠나지 않는 가운데 한마음으로 이 세계를 주관하는, 그리하여 처한 그곳에서 천지의 주인공이 되는 삶이 바로 참된 수행이다.

대종사가 제자들과 함께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하고, 공동생활로써 주경야독, 반농반선, 이사병행의 결사운동을 일으킨 것은 영육쌍전의 정신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행의 기본인 좌선에서 수승화강과 식망현진의 경지, 수양력 획득에 있어 기질수양과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것도 그 근본과 일치한다. 오늘날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균형을 위해서는 일심·알음알이·실행과 의식주 육대강령의 조화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마음은 근본이 되고 육신은 끝이 되며, 세상에 있어서 도학은 주가 되고 과학은 종이 되는 바, 이 본말과 주종을 분명히 알아야만 비로소 도를 아는 사람"(〈대종경〉 제4인도품 5장)이라는 법설처럼, 삼대력이 주가 되어 의식주가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

사실 역사는 크고 작은 정신혁명에 의해 진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앞서가는 과학과 물질의 발전으로 영혼이 피폐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온전한 삶의 풍요를 위한 '영육쌍전법'은 이 시대를 성찰하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7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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