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최근 교화단에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기대와는 달리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한 악마의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에서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자, 직장에서는 충실한 군인이었던 그는 어떤 사사로운 감정이나 판단 없이 오직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업무를 이행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어떤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 사고하지 못한 그에게 한나 아렌트는 '사유불능성'이라는 죄명을 붙여주었다.

학교에서 마음공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면 입시 공부에 한창인 아이들은 공부하기도 바쁜데, 왜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지 반문한다. 경쟁과 입시라는 지표가 가득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 가치관에 몰입되기 쉽기 때문이다. 마음공부를 통해 정확히 무엇인가 특별하게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것을 통해 나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유불능성의 죄처럼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지 않은 죄도 있지 않을까.

공부를 잘하고 인간관계가 좋으며 직업도 훌륭하더라도 마음을 한번 챙기지 못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큰 문제가 된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도 가스 불 하나 챙기지 못하면 큰불이 날 수 있는 법이다. 바로 챙기지 않은 죄이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은 죄의 재판장은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았던 예루살렘의 재판장처럼 방송으로 중계되고 있지는 않지만, 인과라는 통신망을 통해 세계와 우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는 진리의 판결 아래 소소영령한 인과의 판정을 기어코 받고야 만다.

아이히만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을 따랐을 뿐이었다. 하나의 사회와 그 상식에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을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 악은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하다는 것이다.

마음공부라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공기 속에 살며 공기의 소중함을 잊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면서 그 마음에 대해 잊고 산다면 마음에 대한 사유불능성이 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이 있다. 로댕이 제작한 이 조각상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의 고통과 번뇌, 죽음 등에 대한 고뇌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국보 83호인 반가사유상은 싯다르타 태자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조각이다. 이 반가사유상의 사유하는 모습과 입가에 띈 미소를 보면 그 숭고하면서도 잔잔한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두 조각상이 유명한 이유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고 있다. 경쟁과 입시라는 환경 속에서 삶과 마음에 대한 사유를 전해주고 싶은 요즘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