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큰 눈길을 끌고 있는, 비범한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제목부터 매우 파격적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을 통해 '읽기'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펼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저자가 던지는 이 질문과 대답이 책의 핵심이다.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 (…)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 혁명보다 더 멀리에 있는 혁명으로부터, 더 오래되고 더 광대한,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혁명으로부터.' 이 문장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형상은 모두 여러 혁명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현재라는 것이다. 

루터는 당시 교회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을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서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거듭 거듭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썩은 세상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확인한다.

또한 루터는 쓰기 시작했다. 먼저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쓰고,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모든 분야에 글을 써서 127권의 저작을 남긴다. 그래서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한다. 대혁명이 성취됐다.

저자는 '혁명'이란 '읽기'에서 나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현상은 '읽기'와 같은, '혁명 같지 않아서 더욱 진정한 혁명'에서 나온 결과며, 이 모든 혁명의 본질은 읽고 쓰기, 즉 '문학'이라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이며, 책을 읽은 나는 책을 읽기 전의 나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혁명이 아닌가. 

'근래에 선을 닦는 무리가 선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하여 처자가 있어도 못할 것이요, 직업을 가져도 못할 것이라 하여, 산중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야만 선을 할 수 있다는 주견을 가진 사람이 많나니, 이것은 제법이 둘이 아닌 대법을 모르는 연고라, 만일 앉아야만 선을 하는 것일진대 서는 때는 선을 못 하게 될 것이니, 앉아서만 하고 서서 못하는 선은 병든 선이라 어찌 중생을 건지는 대법이 되리요.'    (〈정전〉 무시선법) 

'계룡산이라 함은 곧 밝아오는 양 세상을 이름이요, 정도령이라 함은 곧 바른 지도자들이 세상을 주장하게 됨을 이름이니, 돌아오는 밝은 세상에는 바른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주장하게 될 것을 예시한 말이니라.'(〈대종경〉 변의품 33장) 

종래의 인식적 기반을 뒤집는 이 명쾌한 혁명. 〈교전〉을 읽는 것, '소태산'을 읽는 것은 혁명이다. 〈교전〉을 읽은 나는 읽기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마치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헤매던 사람이 크고 빛나는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처럼. 

그래서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리고 또 읽고, 다시 읽고, 초조해 하지 말고, 천천히, 깊이, 읽어야 한다. '교법'을 읽는 것, '대종사'를 읽는 것은 찬란한 혁명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혁명으로부터 왔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7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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