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담하다보면 오히려 내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이들은 자신의 어려움과 힘든 점을 토로하기 위해 교무를 찾아오지만, 그 아이들의 어려움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상(相)과 착(着)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아이들의 어려움과 괴로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은 더 잘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잘 안 시키는 것 같다는 아이와 자신은 조금 더 놀아야 하는데 학교에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고 있어서 힘들다는 아이가 동시에 왔을 때는 일종의 시트콤 같은 느낌이었다.

똑같은 학교 커리큘럼 속에서도 아이들은 각기 다른 기준점을 들고서 스스로 괴로워한다. 학업과 장래에 대한 현실적 문제와 학생 각기 능력에 따른 부담감의 문제를 뒤로 하고, 일단 '왜 괴로운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의 기준점이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상담할 때에는 그 기준점이 고정불변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인지 묻는다. 최선을 다해야 하고 모든 시간을 활용해야 훌륭한 사람이라는 기준점과 잘 놀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기준점 모두 완전무결한 명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노력한다. 아이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소를 타고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과연 그 소가 벌에 쏘여 미친 듯 달려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소를 계속 운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멈추고 벌에 쏘인 곳을 확인하고 치료해줘야 할 것인가?

언젠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 정문정의 강연을 듣게 됐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임금을 떼이고 폭언을 많이 듣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불합리를 어른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니가 너무 민감하다', '세상은 원래 그런거야', '꼬우면 나중에 출세해라' 등의 말을 듣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그런가보구나 하고 성장하다보니, 후에 바른 말을 하기 위해 손을 드는 후배를 보면 화가 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쟤는 왜 저러냐, 자기만 힘든가?' 하는 생각이 나는 스스로를 자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다툼을 보더라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집과 사회에서  나쁜 영향을 받았던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똑같은 상처를 준다.

어느 날 찾아온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부모님들과 주변 어른들에게 혼나고 겁먹은 채로 찾아왔다. 그래서 아이를 잘 달래고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며 다독거려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뒤로 해맑게 잘 사는가 싶었는데 담임선생님에게 제보가 날아왔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힌다고. 그 아이는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자신의 기준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국 나의 기준점도 또한 발견하게 된다. 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상과 착을 볼 때마다,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길 할 자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반성이 된다. 결국 공부는 서로 하는 것이라는 위안을 삼으며 오늘도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2019년 8월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