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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천죄과 당부득일개회자 彌天罪過 當不得一個悔字
[설교] 미천죄과 당부득일개회자 彌天罪過 當不得一個悔字
  • 박세훈 교무
  • 승인 2019.08.08
  • 호수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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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훈 교무
박세훈 교무

[원불교신문=박세훈 교무] 전산종법사께서는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란 취임 법문을 내려주셨습니다. 저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참회라고 생각합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참회문에 참회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 걸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참회하자"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돌아보자" 라는 의미도 있지만 오늘 참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새롭게 시작하자" 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음양상승과 인과보응의 이치
우리는 흔히 '용서한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용서'라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황 따라 '용서'를 하고 '용서해 달라'고 할 필요도 있겠지만 원불교 인이라면 근본적으로 참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의 원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내가 그 원리를 확실히 터득하면 남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없이 참회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참회를 할 수 밖에 없는, 그 우주의 원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대종사님께서는 이 묘한 이치를 음양이 상승하는 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을 변화시키는 이치, 우주를 변화시키는 이치,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복을 지으면 복을 받도록 하는 이치, 세상이 흥하기도 망하기도 하는 이치를 음양의 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복을 지으면 복을 받도록 하는 이치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아닌가? 왜 음양상승의 이치라고 하느냐?"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으세요? 우주적인 입장에서는 주로 '음양상승의 이치'라는 표현을 쓰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주로 '인과보응의 이치'라는 표현을 쓸 뿐 인과보응과 음양상승의 이치는 같은 이치입니다. 

우주는 그 덩치가 크고 만물은 그 종이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의 진리인 음양상승의 이치가 있어서 그 진리의 힘과 섭리에 의하여 세상이 운영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인과의 이치'라고 하고 또는 '법신불'이라고 하고, '일원상 진리'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음양상승의 이치' 이전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진리를 '불생불멸의 이치'라고 합니다. 

지은 바에 따라 과보 주는 작용
그런데 잘못 생각하면 음양상승하는 이치가 따로 있고 불생불멸하는 이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이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치의 체성면으로 말할 때는 '불생불멸의 이치'라 하고 그것의 작용면으로 말할 때는 '음양상승의 이치'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음양상승의 이치를 말하면 자연 그 체성인 불생불멸의 이치에 바탕한 것이며, 불생불멸의 이치라고 말하면 그 작용인 음양상승의 이치가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참회문에서는 죄 지으면 벌을 받고 복 지으면 복 받는 등 진리의 분명한 작용을 주로 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에 불생불멸의 이치라는 표현보다는 음양상승의 이치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이처럼 '음양상승의 이치'가 있어서 모든 생령들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서 상생상극의 업보가 마련되는 것인데, 그 원리가 무엇이냐. 음의 원리는 움츠려 종자로 보존하는 성질을 갖습니다.

가령 내가 저 사람에게 은혜를 많이 입으면 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그런 감사심이 그 사람에 대한 상생의 업인 곧 은혜의 업종자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선악의 업인으로 보존된 것은 때가 되면 반드시 결과로 나타납니다. 음은 인이 되는 것이고 종자가 되는 것이고 양은 드러나는 것이고 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음양상승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는 표현이 다를 뿐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무리 그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어도 선행을 하지 않으면 복을 줄 수가 없고 아무리 그 사람에게 벌을 주고 싶어도 그 사람이 악행을 하지 않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음양상승 또는 인과보응의 이치는 우리가 지은 바에 따라 과보를 주는 작용의 원리일 뿐이지 누가 들어서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참회 거리입니다.
큰 살림을 할수록 
더 큰 참회, 
끊임없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회를 해야 
전업이 소멸되고 
앞길이 열립니다.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죄의 참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르고 짓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경산상사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아는 노래가 나와서 막 따라 불렀는데 그 사실을 대중들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자신은 모르는데 옆에서는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면 참회를 할 수가 없잖아요? 알고도 하기 힘든 것이 참회인데 모르면 더 힘들겠죠?

그러면 모르는 부분은 어떻게 참회를 해야 할 것인가? 법타원 종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대산종사께서 기도하시는 걸 보았는데 그 기도문 중에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이라는 구절이 있어서 깜짝 놀랐고, 그때서야 비로소 '모르고도 지은 죄'도 참회를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저녁에 심고를 올릴 때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죄를 참회 합니다"하고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모르고 지은 죄를 참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법타원 종사께서는 모르고 지은 죄를 참회할 수 있는 좋은 비결을 '충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르고 죄를 지은 경우에는 충고가 가장 소중합니다. 왜냐면, 자기는 모를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왜 자기는 모르는 것일까요? 자기 눈을 자기가 볼 수 없듯이 자기 그림자에 가려서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환히 알고 있습니다.

대산종사께서는 누가 잘못했다고 하면 "야! 모르고 그랬을 것이다. 알면 그 사람이 그랬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니요. 다 알아요. 다 알고 그랬대요"하고 말씀을 드리면 "야! 어쩌다 그랬나 보다"라고 다시 두둔해 주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모르고 그랬을 것' 두 번째는 '어쩌다 그랬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어쩌다 그런 것, 그것이 바로 실수입니다.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무덤에 간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각양각생의 실수들을 하고 삽니다. 실수없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이 따르고 더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때문에 완전히 공개를 해서 실수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충고를 하면 고맙게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도 적어지고 모르고 짓는 죄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참회를 할 때는 충고를 해 주는 사람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자기자신의 확실한 책임, 참회의 중요성
대종사님께서는 참회문에서 죄업의 원인을 탐·진·치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면 법강항마위부터는 탐·진·치를 다 조복 받았을 텐데 참회를 안 해도 될까요?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께서 더 참회를 많이 하시고, 책임을 지는 분이 참회를 더 많이 한다고. 책임이 많으면 참회할 거리가 더 많습니다. 내가 우리 교당 전체를 내 책임이라고 본다면, 참회할 것이 많은데 내 책임이 내 가족에게만 머문다면 참회할 것이 적어질 것입니다. 

나는 하나도 책임이 없고 모두가 저쪽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참회할 거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이라도 확실하게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참회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참회라도 하는 사람은 자기라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를 내 책임의 범위로 두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 하나인지, 내 가정까지인지, 내 교화단까지인지, 내 교당까지인지, 교단 전체까지인지, 전 생령까지인지 말입니다. 우리 스승님들은 천지공사를 하고 계시니까 늘 참회를 하십니다. 모든 것이 참회 거리입니다. 큰살림을 하실수록 더 큰 참회, 끊임없는 참회를 하십니다. 그렇게 참회를 해야 전업(前業)이 소멸되고 앞길이 열립니다.

채근담에 '미천죄과 당부득일개회자(彌天罪過 當不得一個悔字)'란 말이 있습니다. 해석하자면 '하늘을 덮을만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뉘우칠 회자 하나 당하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참회문을 말씀하시면서 "참회는 횡재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100을 받아야 하는데 200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참회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회공부를 통해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우리가 되길 염원 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2019년 8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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